어머니의 마지막 가르침에 의해 ...

노동법, 한보사태 등의 책임을 지고 이홍구 대표가 물러나고 3월 13일 이회창 씨가 후임을 맡았다. 그리고 민주계의 후계 대안으로 거론되던 최형우 의원이 후임 대표 발표를 불과 하루 앞두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입원하는 일까지 빚어졌다. 또한 대권 후보 중 한 사람이었던 이수성 총리도 물러나고 그 후임 거긴 씨가 임명되었다.

노동법 파동과 한보사태를 거치며 나라는 정치·경제·사회 할 것 없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나날이 혼미에 혼미를 거듭해 갔다. 마치 부실한 한보의 당진제철소 용광로와 같은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도 대통령 선거 출마 여부로 고심했다. 6대 국회 때부터 40년 가까이 정치를 해오면서 나도 언젠가는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하리라는 꿈을 간직해 온 터였다. 전쟁을 겪고 대학 생활을 하면서부터 나는 다시는 6·25전쟁과 같은 비극이 없는 나라를 만들고, 또 통일된 조국의 대통령이 되어야겠다는 큰 꿈을 가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정치를 하면서도 언제나 당보다 국민을 생각하는 정치를 해왔다고 자부했다. 초선 의원으로 한창때였던 1964년, ‘남북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안하여 민족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 했던 일, 서슬 퍼렇게 70년대 3선 개헌을 반대하며 부패 책임자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퇴진을 주장하며 목숨을 건 투쟁을 벌였던 일, 그리고 가깝게는 14대 국회의장 시절 하루를 하더라도 제대로 된 의장을 하겠다며 끝까지 날치기 사회를 거부하여 의장직에서 단명으로 물러났던 일들 모두가 당이나 목전의 개인적 이해보다는 국민을 보고 정치를 해온 나의 정치 역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꿈이 그랬다고는 해도 항상 나는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자신이 하고 싶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운명 지어 준다는 생각을 잊어본 것이 없었다. 온 국민이 대통령을 거의 다 만들어놓았어도 하늘이 무심해 신익희 선생, 조병옥 박사를 쓰지 않았던 것 아닌가.

그리고 또 대권 후보가 되는 과정 역시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이전의 신익희 선생, 조병옥 박서처럼 거당적으로 추대를 받아 국민 앞에 나서는 것이 자연스럽고 순리라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나서고 여러 사람 가운데서 아웅다웅한다는 것은 나의 정서나 체질상 맞지 않는다고나 할까.

그러한 생각들이 나의 대통령관(大統領觀)이요, 또 내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대통령 후보관’ 이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1996년과 1997년, 노동법 파동과 한보사태 등을 거치며 나라의 경제는 점점 허물어져갔고, 누구 하나 책임지고 나라를 이끌고 가는 사람도 없는 혼란스러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도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줄을 이었다. 평생 지역구 출마 한 번 해보지 못 한 교수, 판사 출신들이 너도 나도 나서서 이전투구를 하는 현실을 지켜보며 깊은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나라 현대 정치사의 현장을 지키며 평생 정치를 해왔던 사람으로서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 하는 생각과 함께 내가 과연 그런 진흙탕에 끼어들어 함께 뒹구는 것이 옮은 일인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를 좋아하고 따르던 의원들 중에는 그럴수록 내가 출마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경륜을 펼쳐야 한다고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야당의 김대중·김종필 씨 같은 후보들과 맞설 경륜이 있고, 또 그동안 불편부당, 계파 없는 정치를 해왔으니만큼, 오히려 나 같은 사람이 당내의 모든 세력을 두루 결집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설득 논리였다.

난들 왜 그동안의 모든 경륜을 다 바쳐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욕망이 없었겠는가마는, 그러나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7선으로 국회의장까지 했던, 그리고 나름대로는 평생 큰 오점이 없이 정치를 해왔다고 자부해 온 사람으로서 처음 정치하는 사람처럼 가볍게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항상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나 자신의 강박감과 항상 국민을 의식하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온 나의 처신이 쉽게 나를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신한국당의 대표 인선으로 당내가 들끓던 3월 10일, 몇 달째 병석에 계시던 어머님께서 대구 영남대 부속병원에서 끝내 운명하시고 말았다.

▲ 어머니 박순금 여사와 아들, 손자와 함께 단란한 한 때

나는 한평생 어머니께 걱정만 끼쳐드린 불효자였다. 정치하는 아들 때문에 평생 가슴 졸이며 살아오신 어머니였고, 또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유세장에 나가 청중들에게 깔고 앉을 헌 신문지를 나눠주시던 어머니였다. 나는 어머님의 죽음 앞에서 삶의 무상을 느꼈다.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 나에게 마지막으로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마라”, “남을 나처럼 사랑하라”, 그리고 “남의 일을 도울 때는 내 일처럼 하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무엇이 되려고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는 항상 고고하게 살라는 평소의 가르침을 다시 상기시키고 가신 것이다. 대구에서 어머님을 묻고 서울로 올라오면서 나의 생각은 가닥을 잡아갔고,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해서 부르면 몰라도 내가 직접 나서서 후배들과 다툼을 벌이는 일은 말아야겠다는 쪽으로 나의 생각을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