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해 보니 대선 정국은 나날이 과열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당은 이홍구 대표 후임으로 김 대통령이 지명한 이회창 대표에 대한 자격 시비로 심한 내홍을 거듭했다. 대통령이 처음에는 이한동 의원을 대표로 지목, 본인에게 직접 통고까지 해놓고는 한밤중에 이를 번복하여 전격적으로 이회창 대표를 선임한 절차부터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권 후보 당사자인 이회창 씨가 경선을 눈앞에 두고 대표 자리에 있다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시비기 끊이지 않았다. 다른 대권 후보들은 이회창 대표 본인이 대표 취임 전에 “경선에 나설 사람이 대표가 되면 불공정 경선”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이 대표에게 대표 사퇴의 결단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당은 이 대표가 취임한 1997년 3월 13일부터 6월까지 연일 이 대표와 반(反) 이 대표 진영으로 나뉘어 집안싸움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날만 새면 언론이 여당의 분열상을 보도하는 가운데 이인제 경기지사가 3월 말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후보 경선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졌다.
이회창 대표는 ‘대표 프리미엄’을 문제 삼아 끈질기게 사퇴를 주장하는 당내 경쟁자들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했다. 당은 대선을 눈앞에 두고 적전 분열 양상을 보였다. 나는 그때부터 이회창 대표의 정치력에 회의가 들었다. 판사로서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는 주위로부터 신망을 받아왔다고 하나 정치는 결국 인화와 타협이 근본이고 때로는 양보의 아량도 필요한 것인데, 법조문만 고집하는 듯한 그의 완고함이 과연 정치에서 어떤 도움이 될지 우려스러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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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회창 씨가 유력한 대선후보로서 당대표까지 수행하는 것은 공종한 대선경선이 어렵다는 불만이 나오고, 다른 후보와 대립이 극심했다 (한겨레신문 1997. 4.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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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후보란 자신의 주위부터, 그리고 당내에서부터 신망과 인정을 받아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국민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데 처음부터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려놓고 어쩌자는 것인지 걱정이 앞섰던 것이다.
어쨌든 경선 일을 20일 앞둔 7월 1일 오후,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대표를 맡아달라는 전화가 위원회관으로 걸려왔다.
“이 의장이 대표를 맡아 경선을 이끌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대통령의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전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까지 대통령이 보여준 행보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대통령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이회창 대표 지명 때부터 갈팡질팡하더니 결국 몇 달 동안 당내 불화만 불러왔던 게 아닌가.
“다른 사람을 시키시죠.”
나는 마음이 전혀 내키지 않아 계속 사양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추천하기까지 했다.
“민주계의 원로이신 김명윤(金命潤) 의원을 시키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민주계 운운하자 김 대통령은 기분이 좋지 않아 한동안 말 한마디 없이 숨쉬는 소리조차 전화기에 들리지 않았다. 나도 숨을 죽이고 아무 말 없이 전화기에 귀만 대고 있었다.
한참 뒤 대통령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모든 후보들이 이 의장이 대표를 맡아야만 공정하게 경선을 치를 수 있다고 하니 그러지 말고 내일 국회 대표 연설부터 준비해 주시죠.”
그 다음 날은 국회 본회의에서 각 당의 대표 연설이 있는 날이었다. 나는 대통령의 간곡한 부탁에 마지못해 이를 수락하고 말았다. 이미 당은 당대로, 후보들은 후보들대로 골이 깊어진 상태에서 혼탁하고 골치 아픈 경선 관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끝까지 거절하고 싶었던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여당 사상 최초의 대선 후보 경선을 성공시키기 위해 모두가 노심초사하는데 내가 더 이상 이를 뿌리치는 것도 당인의 자세가 아닌 것 같아 결국 대표를 맡기로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왕 맡았으면 철저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첫날 기자들과의 취임 인터뷰에서부터 이러한 나의 각오를 분명히 밝혔다. 그동안 서로 온갖 잡음을 일으키며 국민을 실망시켜 왔던 대선 후보들에게도 경선을 관리하는 나의 분명한 입장을 전할 필요가 있었다.
“경선이 페어플레이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대통령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후보들은 눈앞의 것만 바라보아서는 안 되며 당의 화합을 최우선으로 하여 겸허히 대의원들의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