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 막판엔 정신력 허탈 상태 보여...

후보 경선은 7월 21일로 확정되었고, 경선 레이스에는 이회창, 이수성, 이인제, 이한동, 박찬종, 김덕룡, 최병렬 의원 등 7명이 최종 출전했다. 그리고 곧바로 경선의 하이라이트인 후보자 합동 연설회가 7월 5일 수원을 시작으로 막을 올렸다.

나는 후보들의 유세에 앞선 대표 인사말에 “이번 경선을 공정하게 치러 획기적인 민주 발전의 계기로 만들자”며 각 후보의 선전과 페어플레이를 강조했다. 전국 16개 시도별로 열린 합동 연설회 레이스는 그 과정에서 후보들 간의 과당경쟁으로 괴문서 살포, 금전 살포 시비 등 일부 잡음을 있었지만 여당의 민주적 경선 과정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한국 민주주의사에 한 획을 긋는 일임이 분명했다.

합동 연설회의 마지막 일정인 서울 연설회에서 불공정 경선을 이유로 박찬종 후보가 전격 사퇴한 가운데 7월 21일 잠실 체조경기장에서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 선출대회가 열렸다. 6명 후보들의 정견 발표 후 바로 실시된 1차 투표 결과 4955표를 얻은 이회창 후보가 1774표에 그친 이인제 후보를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이한동 후보 1766표, 김덕룡 후보 1673표, 이수성 후보 1645표, 최병렬 후보 236표 등의 순이었다.

길고 긴 20일이었다. 합동 연설회가 개최되기도 전부터 이수성 후보의 아버지를 친일파로 음해하는 괴문서가 나와 그 출처를 두고 이회창 후보 측과 이수성 후보 측이 대립했고, 선거 내내 줄서기와 대의원에 대한 금품 살포설에 대한 시비가 이어졌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초유의 여당 경선 자체가 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리고 선구 운동 막바지인 13일 박찬종 후보가 “이회창 후보 측이 후보 등록을 위한 대의원 추천을 받기 직전 2명 이상의 원외 지구당 의원장에게 조직 활동비 명목으로 5천만 원씩을 전달했다”고 주장, 한때 경선 자체가 파국에 직면하기도 했는데 그때가 가장 힘겨운 고비였다.

나는 이에 엄중하게 대처했다. 박찬종 후보 측에는 즉각 근거 자료를 당에 제출토록 지시했고, 이 같은 나의 지시에 박찬종 후보는 대통령 앞으로 증거자료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주례회동 때 대통령을 만나 그 문제의 자료를 건네받았으나 그것은 증거 자료가 아니라 박찬종 후보가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 불과했다.

나는 청와대를 나와 바로 박찬종 후보에게 통보를 한 뒤 그 편지를 그대로 공개했는데, 그 후 박찬종 후보는 끝내 증거를 대지 못한 채 서울 연설회에서 전격 후보 사퇴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나는 대표로서 일주일에 한 번씩 청와대로 올라가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했었다. 나는 갈 때마다 후계 구도에 대한 김 대통령의 분명한 의중을 알고 싶어 여러 차례 그와 솔직한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저한테는 터놓고 이야기를 하셔야지요. 저는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신한국당 대표로서 후보 경선을 관리하며 김영삼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했으나…….

그러나 그때마다 김 대통령은 과거와는 달리 당당하고 고집스러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모든 것이 귀찮은 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내 느낌으로는 그때 김 대통령은 정신적으로 허탈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은 취임 초부터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겠다고 해왔었는데 한보사태를 계기로 측근들의 온갖 비리가 드러나 문민정부의 자부심이 땅에 떨어진 데다, 아들마저 비리 혐의로 구속되어 전 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나는 당시 김 대통령이 막바지 경선 과정이나 대권 구도에 있어서도 누구를 밀고 말고 할 정신적 여력도 없이, 누가 되든지 그저 모든 게 귀찮은 심경 같았다고 기억하고 있다.

▲ 이회창, 박찬종, 김덕룡, 이홍구, 최병렬, 이인제 신한국당 후보들의 각축은 치열했다 (경향신문 1997. 6.10.)

돌이켜보면 사실 그때 여권이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것은 언론에 보도 된 것처럼 김영삼 대통령 자신에게 상당한 책임이 있었다.

1995년 지방선거 직후에는 이인제 후보를 염두에 둔 것처럼 말했고, 1996년 총선을 앞두고 이회창, 이홍구, 박찬종 씨 등을 영입하면서 그들 모두에게 대권 욕심을 불러일으켜 후계 구도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총선 후에는 이홍구 씨를 대표로 앉혔으나 1996년 말 그가 노동법과 파동으로 상처를 입고, 김현철 사태 등으로 여권이 궁지에 몰리자 다시 이회창 씨를 대표로 기용하였다. 그러나 이회창 씨에게는 후계자로서 믿음이 가지 않자 다시 이수성 씨를 미는 등 갈팡질팡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김 대통령이 이렇게 흔들리니 민주계 역시 사분오열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의 생각을 모른 채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하던 민주계가 막바지에 부랴부랴 ‘정치발전협의회(政治發展協議會)’를 만들어 대안을 모색했으나 그때는 이미 각각 이수성, 최형우, 김덕룡, 이회창 쪽으로 네 갈래로 나누어진 이후였고 마지막까지 혼란만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고 여권이 대선에 실패하자 모든 책임을 이인제 후보에게 돌리는 경향도 있지만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 역시 이러한 김 대통령과 여권의 무책임한 행보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내가 당 대표로 지명된 다음날부터 경선을 무사히 치른 21일까지는 정말 하루하루가 1년 같았다. 21일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순간 모든 사람의 눈길은 선출된 후보에게로만 집중되고 20일간 내가 겪은 남모르는 고초와 노력은 땅속에 묻히고 말았지만 나는 괘념치 않았다.

나는 나 개인에게는 아무 이득도 없는 일을 맡아 최선을 다해 경선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으며 그 후 사람들로부터 “이만섭 의장이었으니까 7명이나 되는 대선 주자들을 이끌고 경선을 제대로 치렀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경선 자체가 파국으로 흘렀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래도 조그마한 위안을 느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