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신한국당의 대통령 후보로 이회창 씨가 선출되었으나 그것은 갈등의 종식이 아니라 새로운 혼란의 시작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선출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 후보 두 아들의 병역 의혹 문제가 다시 터져 나왔다.
야당은 신한국당의 후보 선출 바로 다음 날부터 포문을 열었다. “조간신문에 난 이회창 후보의 가족사진을 보라. 저렇게 건장한 두 아들이 몸무게 45kg으로 군 면제라니 누가 믿겠는가. 신장 179cm에 몸무게 45kg은 의학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다”라는 야당의 공격이 쏟아졌다.
그리고 마침 열려 있던 임시국회 대정부 질문에서도 야당 의원들은 모든 초점을 이 후보 아들들의 병역 의혹에 맞췄다. 야당 의원들은 이회창 후보의 아들 2명이 각각 18kg가 10kg씩 고의 감량한 증거가 있다며 이 후보의 후보직 사퇴를 촉구했고 총리에게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고건 총리의 본회의에서의 답변과 김동진(金東鎭) 국방장관의 상임위 답변이 서로 달라 야당의 공세는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신한국당과 이회창 후보는 이에 대해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지 못했고, 그러한 가운데 방송 3사에서 공동 주관하는 대선 후보 TV 토론이 시작되었다. 여당에서 이회창 후보가 확정된 만큼 후보 간의 기나긴 TV 토론 레이스가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나라 안의 모든 관심은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 의혹으로 집중되었고 잇달아 이 후보의 아들의 병적 기록부 부모 란에 이 후보의 형 이름이 기록되어 있음이 추가로 폭로되었다. 고위층 자제임을 감추고 병역 면제를 받기 위한 편법이라는 것이 야당의 주장이었고, 이에 이 후보 측에서는 동사무소 직원의 착오 때문이라는 궁색한 답변을 하여 다시 여론이 들끓었다.
이렇게 되자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도 급격히 떨어졌다. 한 사람도 아니고 아들 둘 모두가 체중 미달로 병역 면제된 것이 국민의 공분을 샀으며, 특히 그때 이회창 후보 측에서 국민에게 깨끗이 사죄하기보다 법률적으로 하자가 없다느니 하며 변명만 늘어놓은 데 대해 국민들은 더욱 격분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 후보의 지지율은 급전직하 심각할 정도로 떨어지고 있는 반면 야당 김대중 후보와 김종필 후보 간의 DJP 연합은 착착 진행되어 나갔고, 이에 라 여론조사 지지율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부동의 1위 자리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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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7년 7월,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신한국당 전당대회에서 제15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이회창 당선자가 김영삼 대통령과 손을 맞잡고 대의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가 선출되자마자 두 아들 병역의혹 문제가 다시 터져 나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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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데 비례하여 연초부터 TV 토론에서 인기를 얻어 신한국당 경선에서 의외의 2위를 차지한 이인제 지사의 지지율도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회창 후보 아들들의 병역 의혹에 따른 국민들의 실망감 때문에 이인제 지사 쪽으로 지지자가 몰리는 것으로 분석되었고, 이인제 지사 측에서 독자 출마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이 10%대에서 움직이지 않고 날이 갈수록 여론이 악화되자 여당인 신한국당은 일종의 ‘패닉 현상’에 빠졌다. 다시 심각한 내분이 재연되었고 본격적으로 ‘후보 교체론’이 대두되었다. 이 후보가 3월 대표직을 맡아 불공정 시비에 휘말린 때부터 시작된 이회창 대 반 이회창 진영 간의 반목이 또다시 불붙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 여당이 겪은 사상 초유의 혼돈 상태에 기가 막히지 않을 수 없었다. 당의 원로로서 어떻게 해서라도 파국으로의 길만은 막아보려 안간힘을 다했다. 여당이 대통령 선거를 눈앞에 두고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을 따라 대통령 선거를 치른 1963년 이래 여당의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문회의를 통해 누차 “모두가 사심을 버리라”고 촉구했다. 개인보다는 당, 당보다는 나라와 국민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소리를 높였지만 당의 내분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라 있었다. ‘후보 교체론’이 극에 달하던 1997년 9월 8일, 신한국당의 국회의원과 지구당 위원장 연석회의가 소집되었다. 모든 것을 원점에서 시작해서 허심탄회한 대화를 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그날 회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의 입장만 재확인하고 서로의 결별을 예고하는 자리나 다름없었다. 주류 측은 “민심은 수시로 변하며 지지율도 얼마든지 오르내린다. 이회창 후보의 지지도 하락은 비주류나 경선 패배 후보들의 비협조 때문이다”며 여전히 비주류 측을 자극했다.
이에 비주류 측은 “경선 승복이라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더 큰 지상과제는 정권 재창출이다”라는 논리로 맞받았다. 특히 이인제 지사로의 후보 교체를 주장해 온 김학원(金學元) 의원과 유성환(兪成煥) · 박태권(朴泰權) 전 의원 등은 “정당의 존립은 집권이다. 그런데 이 대표의 인기는 이제 회복 불가능이다. 군의 사병들은 이 대표의 해명을 비웃고 있다. 장병들의 가슴을 멍들게 한 만큼 이 대표는 국민 여론을 받들어 살신성인의 자세로 후보를 사퇴하고 전당대회를 열어 새 후보를 선출해야 한다”며 직설적으로 이 후보의 후보 사태를 요구했다.
나는 그날 회의 내내 침통한 심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회의 마지막에 단상으로 나가 의원들을 향해 호소했다.
“이 대표 측이나 비주류 측 모두는 서로 입장을 바꿔놓고 진지하게 나라를 걱정해야 한다. 내가 이 대표나 이인제 지사나 누구를 만나 봐도 모두 당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는 차이가 없었다. 우리 모두는 다 같은 당원이다. 모두가 모두를 품에 안고 힘을 모아 나가야 한다.”
내가 이러한 요지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한 호소를 하자 의원들이 다가와 좋은 충고를 해주었다고들 했지만 나는 그때 이미 때가 늦었음을 절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