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경기지사의 대선 출마 (1...

이러한 때에 이인제 씨가 경기지사를 사퇴하고 추석을 앞둔 9월 13일 대통령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경선 불복에의 책임은 통감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21세기의 소명인 3김 청산이 무망하다”며 3김 청산과 세대교체, 그리고 역동적인 리더십을 주창하고 나섰던 것이다.

이인제 지사가 출마를 선언해 후보군에 가세하고 MBC 주최 TV토론회가 끝난 9월 27일 후보들의 지지율은 김대중 후보가 31.9%로 여전히 선두를 지키는 가운데 이인제 후보가 23.3%로 2위, 그리고 이회창 후보 17.1%, 조순 후보 9.1%, 김종필 후보 4%의 순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그 무렵 신한국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이회창 후보를 총재로, 김영삼 대통령을 명예총재로 추대했으며 신임 대표에 이한동 의원을 선출했다. 총재가 된 이회창 후보는 더 이상의 당내 분란은 용납하지 않겠다며 “후보 교체론자는 당을 떠나라”고 통첩하는 가운데 여당의 내분은 마침내 원치 않던 극단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10월 22일 이회창 총재가 전격적으로 김영삼 명예총재의 탈당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것은 이 후보 측이 당시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김 대통령을 내치는 것이 오히려 대선에 도움이 된다는 자체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당에서 폭로한 김대중 후보의 대선 비자금 의혹 수사를 검찰이 서둘러 종결한 것 등으로 봐서 더 이상 김 대통령을 믿을 수 없다는 판단도 내린 것 같다.

이때 김 대통령은 즉각 탈당 거부를 천명했고, 민주계 의원들은 “누가 만든 당인데 누가 누구에게 나가라고 하느냐”며 일전불사를 다짐하는 등 당의 내분은 극한까지 치달았다. 그리고 급기야 11월 6일 포항에서 열린 대선 필승 경북지역 결의대회 도중 ‘YS’라고 적힌 인형을 당원들이 몽둥이로 패고 화형식까지 하는 일이 일어나는 가운데 김 대통령은 그 다음 날 스스로 신한국당을 탈당해 버렸다.

▲ 이회창 후보의 병역의혹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며 경기지사를 사퇴하고 대선출마를 선언한 이인제 씨 (한겨레신문 1997. 9.14.)

나는 그때 벌어지는 정치 상황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1996년 총선 이후 노동법 날치기 사건과 한보사태, 그리고 김현철 청문회 등을 거치며 나라 꼴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었다. 나날이 위기로 치닫는 경제 상황 속에 나라의 근간을 지켜야 할 집권 여당의 이전투구가 1년 이상을 끌어오다 마침내 여당이 파국을 맞은 것이었다.

한평생 정치를 하며 온갖 풍상을 직접 몸으로 겪어왔던 나였지만, 그 때처럼 허탈과 배신감을 느낀 적은 일찍이 없었다. 대통령이 대통령이 아니었고, 여당이 여당이 아니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누구 하나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책임지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하루 하루 불안의 늪 속으로 나라가 끌려 들어가는 듯했다.

여당 총재가 대통령인 명예총재에게 탈당을 요구하고, 여당 대통령 후보의 지지율이 밑바닥에서 헤매자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던 경제는 눈에 띄게 악화되어 갔다. 여당 내분이라는 악재로 연일 하락을 거듭하며 어떨 때는 사나흘에 100포인트까지 하락세를 기록하던 주가가 김 대통령이 신한국당을 탈당할 무렵에는 500선지 무너졌다.

환율도 그때 벌써 1달러당 957원으로 치솟으며 사실상 시장 기능에 의존하지 못할 정도였다. 정말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치인이라면 정권 재창출이니, 정권 교체니 하는 구호를 외칠 게 아니라 경제를 살리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서야 했다. 여당이 혼란에 빠져 헤매고 나라 사정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이회창 진영 대 반 이회창 진영의 당내 대립 구도에서 중립적 위치를 지켜온 나도 조금씩 생각이 바뀌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여당이 중심을 잡아야 하는데 이회창 후보 체제로는 그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모두를 포용하는 화합 정치를 하기에는 이 후보는 적합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이 후보로부터 결정적으로 마음이 떠난 것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의 정치 행보 때문이었다. 이 후보는 자신을 감사원장, 국무총리, 그리고 여당의 대표로 기용해 대통령 후보 자리에까지 이르게 한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 김 대통령에 대해 아무런 격식도, 예의도 차리지 않은 채 당을 떠나라고 요구하는 것은 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로 나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의 꼴이 더없이 한심하고 정치를 한다는 게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정말 많은 시간 고뇌의 밤을 지새웠다. 한국 정치에 대해 그때처럼 실망해 본 적이 없었고 국민들 보기가 부끄러워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이 나라의 정치가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