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와 군정으로 지난 세월을 보낸 이 나라가 문민정부가 들어서도 정치는 늘 그 모양이었고 야당은 야당대로 대안이 될 수 없었다. 정치가 지긋지긋해지고 여당에 소속되어 있다는 게 싫어졌다. 그리고 총재와 명예총재가 화형식까지 하면서 서로 싸우는 정당에 몸을 담고 있다는 것을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또한 당의 명예총재인 김영삼 대통령이 후계자 문제를 깨끗하게 정리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한 것에 대해서도 지극히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밤을 새워 번민을 거듭하던 끝에 나는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40년 가까이 정치를 해오고 7선 의원으로 국회의장까지 지냈던 사람으로서 나 혼자서라도 스스로 이런 부끄러운 정치 현실에 대해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10월 28일에 임기가 3년이나 남은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바로 이어 의원회관 239호 내 방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신한국당 탈당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날 기자들에게 나는 나의 사퇴와 탈당의 변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한국당이 유례없는 파국에 직면하고 있는 데 대해 당의 원로로서 국민에게 죄송하고 스스로 책임을 통감합니다. 따라서 나는 오늘의 정치 혼란에 책임을 지고 국민에게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당 상임고문직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바입니다. 지금 여당 안에서 빚어지고 있는 불행한 사태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 지극히 우려되는 일로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당의 명예총재와 총재가 노골적인 반목과 대립을 보이고 있는 오늘의 사태는 정당 사상 일찍이 없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틈바구니에서 국민들은 나라의 갈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고 의원들과 지구당 위원장들은 청와대 쪽과 총재 쪽으로 비정한 줄서기를 강요하는 등 인간적인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평생 정치를 해온 나는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몸으로 느끼며 국민 앞에 사죄하며 용서를 구하는 바입니다. 정치가 더 이상 국민의 짐이 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 정치는 이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 나라 구성원 모두가 진심으로 이 나라의 미래를 생각해 주길 바라고 또 정치인들은 대권보다는 나라를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주길 마음속 깊이 기원하는 바입니다.”
이리하여 나는 3년이나 남은 의원직을 스스로 버리고 말았다. 국회의원이 대통령 후보 선거에 나가기 위해 의원직을 버리는 등의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자의로 3년이나 남은 의원직을 사퇴한 예는 헌정 사상 내가 처음이었다.
주위에서는 “3년이나 남은 국회의원직을 왜 포기하려고 하느냐”며 나를 말렸다. 그러나 이런 정치 현실에서 국회의원 3년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35년 동안 정치를 해오면서 나는 국회의원에게 주어지는 갖가지 특혜나 유·무형의 이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명예를 소중히 여겼고, 국민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여겼다. 그래서 나는 국민들에게 사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정들었던 의원회관을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이틀 후인 1997년 10월 31일에는 서석재(徐錫宰) · 김운환(金沄桓) · 한이헌(韓利憲) 의원이, 그리고 11월 2일엔 박범진(朴範珍) · 이용삼(李龍三) · 김학원(金學元) · 원유철(元裕哲) 의원이 잇따라 탈당했다. 내가 신한국당을 탈당하자 이인제 후보 측에서 적극적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신당의 총재로서 당의 앞날을 지도해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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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가 탈당한 후 신한국당은 깊은 내분에 빠져들고 연쇄탈당으로 이어졌다 (경향신문 1997. 10.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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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원직을 그만두고 신한국당을 탈당할 때는 정말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리고 처음 이인제 전 지사가 대권 출마의 의욕을 보일 때만 해도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 신한국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이 나를 찾아와 3김 시대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를 펼쳐나가는 데 나 같은 원로가 뒤에서 뒷받침을 해주어야 가능하다고 연일 매달리다시피 했다.
평생 정치를 하면서 산전수전을 겪은 나로서는, 신당을 창당하고 소수의 의원들과 젊은 후보를 도와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 가시밭길이 불을 보듯 뻔하고 또 그동안 쌓아온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거는 모험임이 분명했다. 그리고 주위의 반대도 잇달았다. 그래서 나는 미국으로 피해 갔다. 그러나 이인제 후보는 미국까지 장문의 평지와 함께 사람을 보내기까지 했다.
신당 측에서 나를 영입하려고 백방으로 뛰고 있다는 보도가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왜 이 의장이 조카뻘 되는 사람을 위해 그런 고생을 자청하려 하는가” 하고 만류하기도 했다. 특히 내 연고지인 대구·경북 쪽에서는 반대가 심했다. 그러나 신당 측의 간청은 집요하게 계속됐다.
나는 밤을 새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결단을 내렸다. 하늘이 도와 내가 직접 큰 뜻을 펼칠 수 있다면 내가 나서겠지만, 그러지 못할 바에야 당락을 떠나 후배들의 간청을 받아들여 이 나라의 세대교체를 위해 스스로 밑거름이 되는 것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내가 좀 더 신중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11월 3일, 나는 국민신당에 입당했다. 신당 기자실에서 열림 입당 환영식에서 나는 비장한 심경으로 입당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저는 이 땅에 새로운 정치와 세대교체를 이룩하기 위해 뜻을 같이하는 의원들과 함께 이 자리에 섰습니다. 평생 정치를 하며 이 나라 정치의 비원(悲願)을 가습에 새기고 있는 저는, 이 나라의 미래와 후손들의 내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정치는 진정 새로워져야 합니다. 저는 모든 것을 걸고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마음으로 이 땅에 기필코 새로운 정치를 이룩하고자 한 알의 밀알이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21세기를 앞둔 오늘, 이 나라 정치가 또다시 구시대의 음습한 밀실로 회귀할 수는 없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는 새 정치와 구 정치, 이 나라의 새로운 미래와 어두운 과거와의 싸움입니다. 이제 우리 다 함께 새로운 날을 향하여 온 국민과 함께 힘을 모아 나아갑시다.”
이처럼 내 모든 것을 걸고 결단을 했으나 예상했던 대로 험난한 가시밭길은 바로 입당 다음 날부터 펼쳐졌다. 국민신당 창당대회가 열리는 11월 4일 당일 아침, 《J일보》를 펼쳐 보고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