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신당 창당 지원’이라는 주먹만 한 제목의 머리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 기사는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양 측의 신당에 대한 공격을 한꺼번에 싣고 있었는데 “청와대 조홍래(趙洪來) 정무수석이 롯데호텔에 방을 얻어놓고 본격적인 이인제 전 지사 지원 작업에 나서고 김용태(金瑢泰) 청와대 비서실장도 가세하고 있다. 국민신당이 이인제 신당인지 김영삼 신당인지, 그리고 여당인지 야당인지 분명히 밝히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이 거의 김대중 후보에 육박하고 특히 나와 신한국당 의원들이 탈당한 후 11월 2일에는 이인제 후보의 지지율이 오히려 1%포인트 가량 김대중 후보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 데 대한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의 초조감에서 나온 모략이라고 판단했다.
아무리 정치판이 살벌하다 해도 창당대회 당일에 이럴 수가 있는가? 양당(兩黨)과 일부 언론이 어떻게 이런 장난을 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분노가 치밀었지만 애써 속으로 삼키며 전당대회장으로 향했다. 잠실 올림픽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국민신당 창당대회에서 4천여 대의원들은 나를 국민신당의 총재로, 그리고 이인제 씨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을 따라 정치를 시작한 이래 거대 여당도 해보고 자그마한 야당도 해보았으며, 또 당을 창당해 보기도 하고 그 당이 해체되는 아픔도 겪어야 했던 나로서는 실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나는 총재 취임사 연설 말기에 아침에 청와대 지원 등 허위 사실을 보도한 일부 언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지금 다른 당에서 우리 국민신당과 이인제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하자 청와대가 우리 당을 지원하는 것처럼 중상모략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청와대가 이인제 후보를 밀었다면 이 후보는 벌써 신한국당의 후보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새 세상은 밝아오는데 뒤로 만의 회귀를 강요하는 이 시대착오적인 행렬은 이제 중단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 국민신당의 닻은 올랐고 ‘새 정치’로의 기나긴 여정은 시작됐으나, 이인제 후보의 인기와 지지율을 떨어뜨리려는 신한국당과 국민회의의 공격은 날이 갈수록 집요했다. 창당 당일 ‘국민신당은 YS당’이라며 생일날 재를 뿌리더니 신당을 임해하는 톱기사가 하루에 한 건씩 영이어 터져 나왔던 것이다.
11월 5일엔 《J일보》와 《C일보》에 ‘국민신당 창당자금 의혹 제기―청와대 관련 있을 것’이라는 머리기사가 나오더니 그 다음 날인 6일엔 신한국당이 “김영삼 대통령의 1992년 대선자금 잔여분 2백억 원이 이인제 후보에게 유입됐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도 톱기사로 보도했다.
그리고 급기야 국민회의측에서는 “김현철 씨가 관리하던 대선자금 중 2백억 원이 영부인인 손명순(孫命順) 여사를 통해 이인제 후보의 부인 김은숙(金銀淑) 씨에게 전달됐다”는 거짓 폭로까지 했다.
이 ‘손 여사의 2백억 지원설’은 국민회의가 반나절 만에 취소하기는 했지만 이미 신문에는 대문짝만 하게 보도된 이후였다. 국민신당에서는 분을 삭이지 못해 허무맹랑한 거짓을 발표한 국민회의 김민석(金民錫) 부대변인을 ‘허위 사실 유포죄’로 즉각 고발하였다.
선거가 끝난 직후 김민석 부대변인이 나의 《동아일보》후배이면서 국민회의 선대위 기획조정위원장이었던 장성원(張誠源) 의원과 함께 당사로 나를 찾아와 허위 사실을 발표한 데 대해 공식으로 사과하고 용서를 빌었다. 이에 나는 “정치를 정직하게 해야지, 거짓말을 하거나 잔꾀를 부려서는 안 된다.”고 엄중하게 충고를 하고 젊은 국회의원의 장래를 생각하여 그 자리에서 바로 고소를 취하하도록 조치한 바 있다.
이처럼 창당대회 당일부터 전개된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양당의 ‘협공’과 일부 언론의 악의적인 허위 보도록 갓 출범한 국민신당은 엄청난 상처를 입었다. 김영삼 대통령과 국민신당을 연결 짓는 파상공격 때문에 신당이 창당되면 바로 신한국당을 탈당하고 신당 쪽으로 입당할 것으로 기대됐던 신한국당 내의 많은 민주계 의원들이 주춤했고, 그 이후로 신당은 더 이상 한 사람의 국회의원도 늘릴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던 대구·경북 지역에서 이인제 후보의 지지도가 뚝 떨어지고 유권자들이 한꺼번에 이회창 후보 쪽으로 쏠린 것은 결정적이었다. 한때는 대구·경붑 사람도 아닌 이인제 후보에게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보내던 대구·경북의 민심이 ‘신당은 YS당’이라는 한마디에 거짓말처럼 등을 돌렸고, 한번 돌아선 민심을 선거기간 내내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일부 언론의 악의적인 허위 보도록 신당은 출발부터 치명타를 맞았던 것이다. 과거 언론계에 몸담으면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 옥고까지 치른 바 있던 나로서는 특정 정당이 일방적으로 발표한 허무맹랑한 주장을 사실 확인도 없이 과장 보도한 당시의 언론을 보고 한없이 부끄럽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나는 우리나라 신문 기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대통령을 만든다는 오만한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처럼 신당이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을 당하고 있는 사이 내각제 개헌을 전제로 한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이른바 ‘DJP 연합’이 최종적으로 타결되어 11월 3일 후보 단일화 조인식을 가졌고, 신한국당은 민주당과의 합당을 선언함으로써 이회창 후보, 조순 총재의 한나라당을 출범시켰다.
거대한 양 진영 사이에서 우리 국민신당과 이인제 후보는 그야말로 일엽편주로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야만 했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우려하던 경제 대란, ‘IMF' 까지 터졌다. 11월 22일 임창렬(林昌烈) 경제부총리가 “금융 외환시장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자금을 요청키로 했다”고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는 마침내 IMF 체제 아래 들어갔고, 24일 IMF의 휴버트 나이스 실무협의장단 일행이 한국에 들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