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급기야 IMF 당국에서는 한국의 대통령 후보 3명에게 대통령에 당선되면 IMF 관리 체제에 대한 이행을 약속한다는 각서에 서명할 것을 요구해 왔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끄럽기 그지없다. 12월 3일 IMF의 캉드시 총재가 합의문 서명식을 미루면서까지 후보들의 이행 각서를 요구하자 다급해진 경제기획원 관리들이 대선 후보들의 도장을 받으러 이리저리 동분서주했던 일은 생각하기도 싫은, 힘없는 나라의 설움 그 자체였던 것이다.
우리 당에는 강만수(姜萬洙) 당시 경제기획원 차관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강만수 차관은 내가 국회의장 시절 국회 재경위 전문위원으로 재직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던 사이였다. 강만수 차관이 사색이 되어 내놓은 각서 서류는 얼마나 급하게 만들었던지 서류 양식이나 타이핑 상태 등이 도대체 정부의 문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한 것이었다.
그 전에 우리 등은 이미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이 제안한 ‘3당 총재 후보 경제 영수회담’을 거부한 바 있었다. 우리 당은 “나라를 그처럼 망쳐놓고 한가하게 밥이나 먹고 사진이나 찍어서 무얼 하겠는가? 우리는 그 시간에 경제 살리기 캠페인에 돌입하겠다”며 청와대 회동을 거부 했던 것이다.
그러나 IMF가 정부와의 합의문 서명도 미루고 후보들의 각서 서명을 요구하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유세 중이던 이인제 후보와 통화를 한 끝에 이인제 후보의 도장을 대신 찍어주었지만, 나라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기가 막히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처럼 나라는 ‘IMF 통제 체제’로 들어가고 나라의 앞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았지만 투표일은 하루하루 다가왔다. 청와대 지원설로 급작스럽게 하락세를 보인 지지율은 좀처럼 회복이 되지 않았지만 이인제 후보 가는 곳마다 기존 정치 체제에 실망하는 많은 젊은 층과 서민층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세 차례에 걸친 후보간 TV 합동 토론회에서도 이 후보는 선전을 했다. 그러나 한 번에 3억 원이 드는 TV 연설을 김대중, 이회창 두 후보가 허용 횟수 22회를 다 소화한 데 반해, 이인제 후보는 돈이 없어 4회밖에 사용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선거 중반부터는 광고, 홍보물 등 외상값을 받으러 온 수십 명의 채권자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총재실 앞에서 농성을 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청와대의 지원을 받았느니, 손명순 여사에게서 2백억 원을 받았느니 하는 모략에 결정적인 피해를 당했던 국민신당과 이인제 후보가 돈이 없어 TV 연설도 못하고 빚 독촉에 시달리는 기막힌 현실이 그제야 알려졌지만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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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론에 앞서 포즈를 취하는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후보 (사진출처 / 시사저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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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의 막바지인 12월 8일, 한나라당의 박찬종 고문이 입당하여 선대위원장으로 바로 부산·경남 지역에 투입되기도 했지만 그때는 이미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이 당선된다”는 이회창 후보 진영의 논리가 먹혀 들어가던 때여서 기대했던 만큼의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12월 14일 열릴 예쩡이던 마지막 TV토론을 앞두고 이회창 후보의 서울법대 동창이고 장관과 국회의원을 지낸 모 인사로부터 급히 만났으면 하는 전갈이 왔다.
그는 나와도 잘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이회창, 이인제로 나뉘어져서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인제 후보를 책임 총리로 하는 것을 비롯한 어떠한 조건도 받을 테니 이 총재께서 이인제 후보를 사퇴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투표를 앞둔 마지막 협상이었던 것이다.
“이게 이회창 후보 자신의 뜻입니까?”
내가 일단 확인을 해보았다.
“물론입니다. 동기동창인 제가 전권을 위임받아 왔습니다. 이 총재께서 용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해주었다.
“불가능합니다. 이유는 두 가지요. 첫째는 이회창 후보가 그동안 TV 토론회 등에서 ‘이인제 후보가 사과를 하고 돌아오면 받아주겠다는 식의 고자세를 취해 왔기 때문에 우리 측의 감정이 너무 악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시간이 없질 않소. 그런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나는 이때 이런 중요한 문제라면 이회창 후보가 직접 찾아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직접 전화라도 거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