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신당, 계속된 선거에서 참패...

국민신당은 대선에서 5백만 표를 획득한 정당답게 여소야대 정국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했지만 막상 선거에 임해서는 소수 정당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2일 실시된 대구 달성, 부산 서구, 경북 의성, 문경·예천 등 4개 지역 재·보궐선거에서 우리 당은 두 지역에 후보를 내었으나 두 곳 모두 당선권에 미치지 못했으며 두 달 후 실시된 6·4 지방선거는 철저한 지역주의 선거가 재현된 가운데 16개 광역단체장 중 국민회의 6, 자민련 4, 그리고 야당인 한나라당이 6곳에서 승리했다.

지역 연고를 가지고 있지 못했던 국민신당으로서는 광역 선거는 물론 기초단체장 선거에서조차 외면을 당한 채 당의 진로는 최악의 상태로 빠졌다. 그리고 지방선거에서 자신감을 얻은 여당은 지방선거가 끝나자 안정 의석 확보를 명분으로 본격적인 야당 의원 영입 작업에 돌입했다.

거대 여·야당의 동요와 이합집산은 작은 우리 국민신당에는 집채만 한 파도로 엄습해 왔다. 나는 그때 당의 총재로서 당의 위기도 위기이지만 돌아가는 정치 상황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권이 바뀌어도 무엇 하나 달라지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여소야대의 정치권은 사사건건 정쟁만 일삼고, 선거는 나라 망칠 지역패권주의가 과거보다 더 기승을 부렸다.

그래서 나는 6월 8일 지방선거가 끝난 후 바로 기자회견을 자청 ‘동서화합을 위한 큰 틀의 정계 개편’을 여야 각 당에 촉구했다. 망국적인 지역감정과 지역정당의 폐단을 뿌리 뽑기 위해 국민회의·자민련·한나라당·국민신당 등 모든 정당이 함께 간판을 내리고 보다 큰 틀의 정계 개편을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그날 회견에서 “6·4 지자제 선거는 최악의 투표율과 지역 패권주의의 재현으로 모든 정당이 함께 패배한 부끄럽고 불행한 선거”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향후 정계 개편은 보수·혁신이나 대통령제·내각제 등 노선과 정책에 따라 이루어져야 하며, 여권이 추진 중인 의원 빼가기 식의 정계 개편만으로는 오히려 심각한 정치적 혼란만 자초할 것이므로 동서 화합으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는 국가적 차원의 정계 개편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1998년 치러진 6.4지방선거 결과 (동아일보 1998. 6.5.)

나의 이러한 ‘큰 틀의 정계 개편론’은 진정 사심 없는 나의 소신이었다. 그래서 그달 16일, 김대중 대통령이 3부 요인과 4당 총재를 초청하여 방비 성과를 설명하는 오찬 모임에서도 나는 이를 되풀이했다.

“대통령의 방미 성과는 큰데 그 결실이 국내에서 맺어져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정의 개혁, 특히 정치 개혁이 시급합니다. 국민들이 정치권이 눈만 뜨면 싸움질이나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정치가 경제 위기 극복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의원 수도 줄이고 선거제도도 영남이나 호남에서 다른 당도 당선되도록 대선구제를 채택해야 하며 나라를 생각한다면 인위적인 개편보다는 국민 대연합이 바람직합니다.

이번 방미에서 대통령 말씀대로 대북 문제에 대한 한·미간에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잘 처리됐다면 이제부터는 나라 안의 정치를 잘해야 합니다. 대통령께서는 IMF사태 등 작금의 국난 극복을 위해서나 또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국민 대연합을 구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러한 가운데 열린 7·21 재보선 때 서울 서초갑에서 국민신당 후보로 출마했던 박찬종 고문이 8%대의 미미한 득표율로 4위로 밀려나고, 또 한나라당의 전당대회가 8월 말로 잡히자 당 소속 의원 8명의 사기는 극도로 떨어지고 이에 따라 당은 급속히 해체의 길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때 8명의 의원들은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밤 모여 자신들의 거취를 고민하고 의논을 거듭했는데 부산 출신 의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국민회의와 당 대 당 합당을 원했다. 또한 대통령 후보였던 이인제 고문도 처음에는 합당을 반대하였으나 나중에는 우리 당이 국민회의와 합당 할 것을 나에게 간청해왔다.

당시 나는 끝까지 국민신당을 지키고 싶었지만 다음 국회의원 선거를 의식하는 의원들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국민신당의 진로를 모양 좋게 매듭짓고, 또 가능한 한 의원들이나 당원들의 진로에 도움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기울였다.

정말 그해 7월과 8월은 나의 정치 역정 중 가장 어려운 시기 중의 하나였다.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이인제 후보를 돕기 위해 3년 남은 의원직까지 뿌리치고 나와 풍찬노숙(風餐露宿)해 온 지가 1년에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이인제 후보의 당선을 위해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으니까 도리 없는 일이었지만, 대선 패배 후 힘없고 돈 없는 적은 당의 총재로서 노심초사했던 고초를 그 누가 알겠는가. 평생 남의 돈 한 푼 꾸어본 적 없던 내가 선거 빚을 갚으라고 찾아오는 빚쟁이들로부터 사무실을 뺏기고, 또 그들을 피해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으로 오르내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또 자다가도 몇 번씩이나 깨어나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하고 한숨지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이런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길이고 또 정치를 택한 사람의 길이다’라고 마음을 달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