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정치 평생이 어디 남들처럼 편한 길이었던가. 공화당 시절 남들은 여당을 한다고 했지만 권총 차고 협박하는 김형욱·이후락과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보복을 피해 친척 집에서 몸을 피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정치인의 최고 영예인 국회의장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날치기를 막고, 또 어떻게 하면 여야의 극한 대립을 대화와 타협으로 이끌 것인가 고민하느라 밤잠을 설친 적이 어디 하루 이틀뿐이었던가.
이러한 고심 끝에 나는 아무런 사심 없이, 그리고 순간적인 오해와 이해(利害)를 떠나 오직 나라의 앞날을 위해 대승적인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인제 후보와 대다수의 당 소속 의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새정치국민회의와 통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하늘의 뜻에 의해 정권이 교체되었으면 구시대를 개혁하려는 새로운 정권에 힘을 보태주는 게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통합의 구체적인 절차를 위해 우리 당에서는 서석재 최고위원과 박범진 사무총장, 그리고 국민회의에서는 김영배 부총재와 정균환(鄭均桓) 사무총장 등 4명이 실무협장 대표가 되어 협의를 계속했다. 이 실무회의에서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던 8월 23일 국민회의의 정균환 사무총장이 “오늘 청와대에서 연락이 올 것 같습니다”라는 통보를 해주었다.
그날 오후 4시 30분 나는 청와대로 들어가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다.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오늘의 이 통합이 국민 대연합을 위한 큰 틀의 정계 개편의 전환점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통합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이제 이 총재께서는 앞으로 나라를 위해 큰 역할을 해주셔야지요”라고 화답했다.
“제가 뭐 할 일이 있겠습니까? 국회의장까지 지낸 사람으로서 저는 개인적으로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다만 나라가 어려울 때 대통령께 직언을 해드리기 위해 면회 신청을 할 경우엔 꼭 만나주시기 바랍니다. 부탁이라면 이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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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 국민신당과 새정치국민회의와의 통합에 합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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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대통령은 “그거야 이제 한 가족이 되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렇게 대통령을 만나고 청와대를 나오자 청와대에서는 박지원(朴智元) 대변인의 이름으로 “경제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양당이 통합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내가 청와대를 다녀온 바로 다음 날인 29일 오전 국회의원회의를 열었다. 국민회의와의 통합에는 서석재, 장을병(張乙炳), 박범진, 김운환, 이용삼, 원유철 의원 등 6명의 의원과 대부분의 다원들이 참여를 했고, 지역구 사정으로 김종필 총재의 부여 지구당을 이어받기로 한 김학원 의원은 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민련으로 갔으며, 한이헌 의원은 경제청문회가 끝날 때까지 무소속으로 잔류하기로 했다.
9월 17일 국민회의와의 통합을 위해 국민신당을 해체하는 마지막 전당대회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다. 나는 당원들에게 국민신당 총재로서 마지막 고별사를 했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솟았다. 마치 10년 같았던 10개월간의 국민신당 총재 시절을 떠올리고 보니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국민의 정부 2년째인 1999년에 접어들자 여야의 대립이 심화되고 ‘국민의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비판이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했다. 새해 벽두부터 ‘국회 529호실 사건’으로 국회가 파란에 휩싸이며 국민에게 불안을 안겨주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98년 마지막 날과 99년 첫날 밤 사이 국회 529호실이 ‘정치 사찰을 위한 안기부 분실’로 악용되고 있다며 529호실을 부수고 들어갔다. 국회의장이나 사무총장의 동의도 없이 보도진의 접근까지 막을 채 의사당 사무실을 끌과 망치로 뜯고 비밀문서와 개인 물품을 가져가 일부는 공개하는 사건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에 정부·여당은 이를 ‘국기문란 행위’로 규정하고 이회창 총재를 포함한 관련자 전원에 대한 강경대응 방침을 정함에 따라 여야는 극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국회 529호실 사건으로 여야 대결 국면이 격화된 가운데 국민회의와 자민련 두 여당은 1월 5일부터 7일까지 연 3일간 야당의 격렬한 반대와 육탄저지 속에서 법안·결의안·동의안 등 안건들을 무더기로 날치기 처리했다.
이후 여야의 대치는 더욱 격화되었으며 국민들은 ‘국민의 정부’ 들어서도 재연되는 ‘날치기’와 달라지지 않는 국회 모습에 크게 실망하고 분노하였다. 박준규 의장으로부터 사회권을 넘겨받은 김봉호(金琫鎬) 부의장이 의장석이 아닌 의원석 중간에서 여당 소속 의원들에 둘러싸여 무선 마이크로 의안을 기습 처리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본 나는 비록 국회의원 신분은 아니었지만 전 국회의장으로서 참으로 서글픈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리고 가슴속으로 새로운 각오를 다졌다. 나에게 다시 한 번 국회를 운영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정치부 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평생 가슴에 한으로 맺혀온 날치기만은 국회에서 반드시 없앨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