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DJP 정권에 대한 민심 이반을 부채질하는 커다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한동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관 부인 고급 옷 로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5·24 개각이 있던 바로 그날, 외화 해외 도피 혐의로 구속 기소된 최순영崔淳永 대한생명 회장의 부인 이형자李炯子 씨가 이후 정국에 큰 파문을 몰고 온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남편의 구속을 막기 위해 실세 장관 부인들에게 수억 원대의 옷을 선물했다는 소문이 나돌아 청와대로부터 조사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 이형자 씨는 지난해 말 강인덕(康仁德) 전 통일부 장관 부인 배정숙(裵貞淑) 씨와 김태정 법무장관(당시 검찰총장)의 부인인 연정희(延貞姬) 씨가 옷값 수천만 원의 대금 결제를 자기에게 요구했드나 액수가 너무 커 거절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배 씨는 그런 일이 없다고 극구 부인했고 연씨 또한 마찬가지였다. 김태정 장관의 부연 연 씨는 강남의 라스포사 등 옷가게 여러 곳에서 수백만 원어치의 옷을 샀지만 대금은 자신이 직접 지불했으며, 집으로 배달된 밍크코트는 되돌려 보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얼마 전 내사를 했다는 청와대 측은 문제의 밍크코트는 최 회장 부인 이씨가 가져갔다고 했다.
이뿐만 아니라 옷값에서부터 옷을 구입했다는 시점·장소에 이르기까지 관계자들의 말이 일치하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서로가 서로를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우는 이들의 ‘진실 게임’을 지켜보며 국민들은 분노했다. 이와 함께 정부의 도덕성과 개혁성에도 큰 음집이 생겼으며 국민의 정부는 신뢰의 위기에 봉착했다.
IMF 경제난으로 고통을 받는 국민들은 금 모으기를 하고 허리띠를 졸라매며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치고 있고 200만 명에 가까운 실업자들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는 형편에 고관 부인들은 수천만 원짜리 옷 로비를 받았다, 안 받았다 하고 추잡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데 대해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낀 것이다. ‘50년 만에 수평적 정권 교체를 했다고 하는데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국민들의 정서였다.
그런데도 정부·여당의 대처는 참으로 안이했다. 청와대 측은 내사 결과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고 김대중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사실 관계를 철저히 밝혀야 할 검찰도 미온적이었다. 여당인 국민회의는 맞대응을 한답시고 ‘야당 쪽의 누구누구 부인도 어느 옷가게에 가 얼마어치의 옷을 샀다더라’라는 식으로 주장해 오히려 정치권 전체가 불신을 사는 꼴이 되었다. 사실을 사실대로 밝혀 정치 도의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국민 앞에 사과를 했더라면 여론도 그렇게 악화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집권 여당은 민심의 흐름을 너무나 안이하게 판단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무와 직접 관계가 없는 상임고문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5월 31일 당 간부회의에서 나는 “지금은 시국이 매우 어렵고 민심의 흐름 또한 심각하니 이를 안일하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 결자해지 차원에서 책임질 사람은 한시바삐 책임져야 한다”면서 김태정 장관의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당시 김 대통령은 러시아와 몽골을 순방 중이었으며, 나는 나의 이러한 발언이 김 대통령에게 보고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김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국민의 여론도 나의 주장도 외면하고 말았다. 청와대 측은 거의 모든 언론을 통해 표출된 밑바닥 민심을 ‘마녀 사냥식 여론몰이’의 결과로 치부해 버리고 러시아와 몽골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김 대통령은 민심과는 달리 김태정 법무장관을 유임시키고 말았다.
여론에서 떠밀려 마지못해 법무장관 부인 연정희 씨가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 이형자 씨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는 형식을 빌려 수사를 벌인 검찰 또한 언론과 국민이 제기한 숱한 의혹들을 제대로 풀기는커녕 짜맞추기 해명성 수사에 기치고 말았다.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한 국민의 정부에 대한 성난 민심은 6월 3일 재선거에서 드러났다.
6월 3일 실시된 서울 송파갑과 인천 계양·강화갑 재선거에서 여당은 완패했다. 송파갑은 이회창 총재가 나선지라 여당의 승리가 어려웠다고 하지만 계약·강화갑은 한나라당 안상수(安相洙) 후보와 국민회의 송영길(宋永吉)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펼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한나라당 후보가 13.1% 포인트 차로 이겼다. 결국 검찰의 수사발표에 실망한 유권자들은 국민의 정부의 독선적 국정 운영과 오만에 준엄한 심판을 내린 것이었다.
결국 정부·여당이 나의 주장대로 김태정 장관을 조기에 사퇴시키고 국민 앞에 겸허하게 반성하고 진솔하게 사과를 한 뒤 심기일전 국정을 쇄신하였다면 재선거에서의 참패도, 연이어 터져 나온 실정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6·3 재선 이후 한나라당의 대여 공세가 더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정부의 도덕성과 신뢰성에 타격을 줄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다. 6월 7일 진형구(秦炯九) 대검 공안부장이 점심시간에 폭탄주를 마시고 기자들에게 “검찰이 조폐공사 노조의 파업을 유도했다”는 요지의 취중 발언을 한 것이다.
부인의 옷 로비 사건 연루에도 불구하고 김태정 법무장관의 퇴진 주장을 ‘마녀 사냥식 여론몰이’라고 주장하면서까지 경질하지 않았던 청와대는 진형구 공안부장의 발언이 보도된 직후 김태정 장관을 경질했다. 그리고 정부·여당은 김대중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진형구 대검 공안부장의 취중 발언으로 야기된 ‘검찰의 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국회 국정조사권을 발동키로 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의혹뿐만 아니라 고급 옷 로비 의혹사건, 3·30 재보선 때 국민회의 50억 원 살포설, 고관 집 절도사건 등 일연의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와 함께 특검제 도입도 주장하고 나섰다. 이에 정부·여당은 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의혹에 대해서만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면서 특검제 도입은 반대하였다. 이후 국정조사 실시와 특검제 도입을 둘러싸고 여야 간에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공동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 지도부 간에 불협화음이 생기자 김대중 대통령은 김영배 총재 권한대행과 사무총장 등 당 8역의 사표를 수리하였다.
사실 이때 김 대행 등의 사표는 처음에는 반려되었으나 ‘격노’한 김종필 총리의 요구로 다시 수리되었다. 김 대행은 그동안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합당 발언과 내각제 시기상조론 주장 등으로 김종필 총리로부터 불신을 받아오던 터에 특검제 도입 문제를 놓고 김 총리를 노골적으로 비판함에 따라 김 총리가 김 대행의 경질을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