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대행이 물러나자 당 안팎의 관심을 후임 총재 권한대행과 당직 개편에 모아졌다. 당 안팎에서 하마평이 무성한 가운데 7월 12일 아침 일찍 청남대에서 휴가를 마치고 청와대로 떠나기 직전 김 대통령이 직접 나에게 전화를 걸어 총재 권한대행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고, 나는 이를 사양했으나 “이 어려울 때 이 고문이 아니고는 맡을 사람이 없다”는 간곡한 부탁을 끝내 거절할 수 없었다. 몇 시간 뒤 청와대 집무실에서 대통령과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 김 대통령은 나에게 후임 당직자 후보 명단을 건네주면서 나의 의견을 물었다. 그 내용은 사무총장 한화갑, 정책의장 임채정, 원내 총무에 이해찬(李海瓚) 의원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른 당직자는 문제될 게 없으나 이해찬 의원만은 교육부 장관 당시의 교육정책에 대한 교육계와 사회 일각의 반발이 심해 집권 여당의 원내 사령탑을 맡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김 대통령께 “다른 당직은 다 좋으나 이해찬 의원은 다음 기회에 총무를 맡기시고 이번에는 박상천 의원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강력히 건의했다. 통상적으로 여당의 총재 권한대행이나 대표는 대통령의 당직 인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나는 이례적으로 당을 위해 원내총무 인사의 재고를 강력하게 주장하였고, 김 대통령도 나의 뜻을 받아들여 박상천 의원이 원내총무에 기용되었다.
권한대행으로서 총재의 뜻을 따르는 것이 도리이긴 하지만, 아무리 권한대행이라고 하더라도 총재인 대통령의 인선에 문제가 있다면 이를 바로 잡아 줄 것을 건의하는 소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후 나는 이해찬 의원에게 이 사실을 그대로 알려주었으며 이해찬 의원이 실망할까봐 “다음 기회가 있으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위로한 적이 있다.
총재 권한대행에 취임하자마자 국민회의 소속 임창렬 경기지사 부부가 경기은행 퇴출과 관련해 거액의 돈을 받은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나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비리에 관련된 사람은 단호하게 조처하여 파문을 조기에 수습하는 것이 당과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여 임창렬 지사의 제명을 지시했고, 16일 소집된 당 윤리위원회는 이를 결의했다.
당시 일부 당직자는 제명을 하더라도 미리 청와대 재가를 받아야 한다고 나에게 얘기했으나 나는 당 문제는 일일이 사전에 청와대 지시를 받을 것이 아니라 내 소신대로 하는 것이 오히려 대통령의 짐을 덜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확고한 소신을 갖고 당을 운영해 나가자 오히려 당은 기강이 서고 계파 갈등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7월 22일 김 대통령은 전남 광양시청에서 지역기자들과의 회견을 통해 ‘지금까지 정치에 참여하지 않은 우수한 인재를 영입해 남녀가 같이 참여하고 노(老) · 장(壯) · 청(靑)이 함께하는’ 신당을 만들 것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그리고 그 직후 김 대통령은 나에게 신당 창당에 대한 방침을 대외적으로 밝힐 것을 전화로 요청해 왔다.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겠는데 이 대행이 좀 나서주시오.”
나는 그 순간 신당 창당이 시기적으로 이르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에게 “시기적으로 좀 빠른 것 아닙니까” 하고 되물었다. 그러나 김 대통령은 “내가 벌써 광주에 가서 ‘신당 창당을 시사하는’ 얘기를 해놓은 상황이니 그렇게 해주시지요” 하고 강력하게 주문했다.
김 대통령의 신당 창당에 대한 결심이 이렇게 확고했기에 나는 “꼭 신당을 하시려면 깨끗하고 명망 있는 분들이 많이 영입해야 신당의 명분이 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7월 23일 ‘8월 중 신당 창당 선언’ 방침을 밝혔고, 8월 30일 국민회의는 제4차 중앙위원회를 열어 새로운 국민정당 창당을 공식 결의했다.
이날 국민회의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하고, 국민의 인권과 복지에 최우선의 가치를 두며, 21세기 지식 기반 사회에 대비하여, 노·장·청년층 세대 간의 조화를 이루며 지역주의를 뛰어넘는 전국적 국민정당’을 창당할 것을 결의했다.
이후 청와대와 당내 협의를 거쳐 학계에서 이재정(李在禎) 전 성공회대 총장, 개혁세력 대표로 이창복(李昌馥) 민주개혁국민연합 상임대표, 군 출신으로 이준(李俊) 전 국방장관 등 사회 각 분야를 대표하는 외부인사 19명과 정동영(鄭東泳), 천정배(千正培), 추미애(秋美愛) 의원 등 당내 인사 19명을 합해서 38명의 신당 창당 발기인을 선정하였다. 9월 14일 38명의 창당 발기인은 신당창당추진위원회를 공식 발족시켰으며, 나는 장영신(張英信) 애경그룹 회장과 함께 신당창당추진위원회 공동 대표로 추대되었다.
이로부터 나는 국민회의 총재 권한대행직과 신당창당추진위원회 대표직을 함께 수행하면서 정치 개혁과 새로운 정당 창당을 위해 바쁜 일정을 보냈다.
1999년 10월 10일과 11월 11일 두 차례에 걸쳐 전국적으로 55명의 추진위원을 추가 영입하고 12월 25일 신당창당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으며 나는 계속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한편 신당 발기인과 추진위원 가운데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정명훈(鄭明勳) 씨와 언론계에서 MBC 뉴스데스크 앵커 출신인 이득렬(李得洌) 씨, 그리고 여성 경제인으로 동양도자기 회장이 하태리(河泰里) 씨도 포함되었으나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정치에 몸담지 않고 사심 없이 본연의 직분에만 충실하여 나는 지금도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존경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