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2개월 여의 지구당 창당대회를 숨 가쁘게 펼친 뒤 드디어 2000년 1월 20일 올림픽 체조경기장에서 새천년민주당 창당대회를 가졌으며, 당 대표로는 서영훈(徐英勳) 씨가 선출되었다.
창당대회가 있기 며칠 전 청와대 한광옥(韓光玉) 비서실장이 나를 급히 찾아왔다. 한광옥 실장은 “대통령께서 당 대표로 서영훈 씨를 영입하려고 하니 창당준비위원장께서 양해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하고 나에게 전했다. 나는 당시 서영훈 씨가 정치 경험은 없으나 큰 흠결이 없는 사람으로 생각되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는 총선을 눈앞에 두고 정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표로 영입하는 것이 안타깝고 몹시 걱정스러웠다.
이때 한광옥 실장은 나에게 “대통령께서 16대 국회 비례대표 앞 번호에 보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나는 형식적으로 사양하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오히려 “약속대로 할 것인지를 두고 보겠다”고 답한 일이 있으나 막상 후보 공천 때는 청와대에서 나를 비례대표 후보 4번으로 공천하였다.
이때 나는 몹시 자존심이 상했다. 서영훈 대표에게 맨 앞 번호를 준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총재 권한 대행과 창당준비위원장을 거치면서 실질적으로 창당 산파 역을 맡은 나를 4번 순위에 올린 것은 쉽게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순간 나는 비례대표 후보를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만일 선거 전략상 나를 4번 순위에 올렸다면 차라리 대통령이 사전에 나와 의논하여 19번이나 20번에 올릴 일이지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한 데 대해서는 나 자신이 인격적으로 모독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순위 때문에 후보직을 내던지는 것은 옹졸해 보일 것 같아 고민하다가 차라리 16대 국회에서 의장직을 맡아 국회를 올바로 세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추스르고 당의 선거운동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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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칭 새천년 민주신당 창당 준비위원회 결성대회 참석한 김대중 대통령 내외와 공동창당준비위원장인 필자와 장영신 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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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2000년 4월 13일 새로운 천년의 첫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되었으며 227명의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46명 등 모두 273명의 16대 국회의원이 탄생되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여소야대로 나타났다. 차라리 그때 정치 경험이 없는 서영훈 씨보다 정치 경험, 특히 선거 경험이 많은 나를 대표직에 그대로 두어 효과적으로 선거운동을 벌였더라면 단 몇 석이라도 더 건졌을 것이며, 대선을 앞두고 당이 사분오열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당 대표에 나를 제외시킨 것은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16대 국회는 무소속으로 당선된 강운태(姜雲太), 박주선(朴柱宣), 이강래(李康來), 이정일(李正一) 등 호남 출신 4명 의원이 민주당에 입당함으로써 한나라당 133석, 민주당 119석, 자민련 17석, 민국당 2석(한승수, 강숙자姜淑子), 한국신당 1석(김용환金龍煥), 순수 무소속 1석(정몽준鄭夢準)으로 구성되었다. 어느 당도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나라당이 제1당을 차지하고 자민련은 원개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했다.
과반수 안정 의석 확보에 실패한 민주당은 이른바 정국의 안정적 운영을 위하여 총선 때 갈라섰던 자민련과의 공조 복원을 꾀해 나갔으며, 자민련은 그 대가로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를 요구했다.
2000년 5월 30일 새로운 천년의 첫 국회인 제 16대 국회의 임기가 개시된 이틀 후인 6월 1일, 민주당과 자민련은 국회 원내 교섭단체 구성 요건의 하한선을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공동으로 제출했다. 이에 한나라당은 이를 ‘총선 민의 파괴공작’, ‘위당설법(爲堂說法)’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16대 원 구성원을 앞두고 여야 간에는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 문제로 팽팽한 대치전선이 형성되었으나, 국회 스스로가 법을 어기는 구대를 벗어나 법정 개원일에 원 구성을 마쳐야 한다는 국민의 여망을 여야가 받아들여 6월 5일 의장단 선출이 이루어졌다.
처음 청와대나 동교동계는 내가 의장을 맡는 것을 꺼렸다. 그들은 같은 동교동계의 김영배 상임고문을 밀고 있었다. 이런 기류를 감지한 나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나는 이런 분위기를 주도하던 사람들에게 “국회의장이 야당인 한나라당에 넘어가는 것을 바라지 않으면 여야 의원들의 지지를 두루 받는 나를 밀어야 한다”고 경고를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경고를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의원총회 등 공개 석상에서 내 뜻을 밝혀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하겠다고 마음먹었다.
5월 30일에 열린 민주당의 16대 첫 의원총회에서 나는 “의장 후보를 과거와 같이 청와대 결정에 맡길 것이 아니라 의원들이 민주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자”고 주장했으며 많은 의원들이 박수로 동의했다. 의원총회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당 지도부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지 나의 제안을 수용, 다음 날인 31일 의원총회에서 의장 후보 선출 투표를 실시하기로 했다.
이튿날 의원총회에서 후보 선출에 들어가기 직전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김영배 상임고문이 신상발언을 통해 의장 후보로 나서지 않겠다고 포기 선언을 했다. 그 결과 나는 의원들의 박수 속에 만장일치로 민주당 국회의장 후보에 선출됐다.
일부에서는 16대 후반기 국회에서부터 청와대 지명이 아닌 의원들의 자율적인 지지에 의해 의장이 선출되었다고 주장하나 이는 사실과 다르며 나는 분명히 청와대 지명 케이스가 아닌 의원들에 의해 16대 전반기 의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의장 선거 결과는 내가 140표를 얻어 132표를 받은 한나라당의 서청원(徐淸源) 의원을 제치고 14대에 이어 제 16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됐으며, 야당 몫의 부의장에는 238표를 얻은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이, 다른 한 자리의 부의장에는 자민련의 김종호(金宗鎬) 의원이 187표를 얻어 당선됐다.
선거 결과를 두고 언론과 정치권은 당 대 당 대결 속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여권이 한 표의 이탈 없이 나를 지지하였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 분석은 정확하지 않았다. 나는 여권 표 중에서 4~5표가 이탈했고 반대로 한나라당 의원 가운데서 4~5명이 나를 지지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