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의장에 선출되는 순간 참으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21세기 첫 국회의 수장으로서 실추된 국회의 권위를 회복하고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국회를 만들어야 할 책무가 바로 나의 두 어깨에 짐 지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취임인사와 개원사를 통해 나는 16대 국회를 ‘진정으로 국민과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국회’, ‘생산적이고 민주적인 국회’로 만들기 위해 여야가 다 함께 노력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내 양심과 정치생명을 걸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의장이 될 것을 국민 앞에 약속했다.
특히 개원사의 말미에 “정녕 이 나라 국회는 여당의 국회도, 야당의 국회도 아닌 바로 국민의 국회인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이 자리에서 의사봉을 칠 때,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며, 또 마지막 한 번은 국민을 바라보고 ‘양심의 의사봉’을 칠 것입니다”라고 국회의장으로서 나의 각오를 밝혔다.
그리고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마음으로부터는 이미 당적을 떠났으며 관계법이 계정되면 지체 없이 즉각 당적을 떠날 것을 강조했다. 특히 나는 우리 국회의 고질병인 ‘날치기’를 없애겠다고 수 없이 약속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소신과 각오에도 불구하고 여소야대의 15대 국회를 잡음 없이 끌고 가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은 국회를 무대로 여권을 끊임없이 압박한 반명 민주당은 집권 여당의 프리미엄으로 정국 운영을 주도하려고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에게 첫 번째 시련이 닥쳤다. 법정 기일에 개원이 이루어지고 비교적 순항을 하던 16대 국회는 7월 24일, 국회 원내 교섭 단체 요건 완화라는 뇌관이 터지면서 파행을 겪고야 말았던 것이다.
7월 24일 오후 2시 30분 여당은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운영위원회에서 야당 의원들의 강력한 저지 속에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국회법 개정안을 날치기 처리하고 말았다.
그날 내가 미 국무부 초청으로 미국으로 떠나는 이강래(李康來), 오세훈(吳世勳), 원희룡(元喜龍) 등 젊은 여야 의원들을 환송하기 위해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정균환(鄭均桓) 민주당 총무로부터 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국회법 개정안을 운영위원회에서 일차 강행 처리하려다 실패했습니다”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나는 노발대발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날치기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자 정균환 총무는 “자민련 김종필 명예총재와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골프장에서 만나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를 이면 합의했다는 말이 있으니 우리가 급히 서두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다시 “자민련과 한나라당의 제휴는 될 리도 없고 설사 제휴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당당하게 순리대로 나가야지 날치기는 절대로 안 돼요”라고 재차 강조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불구하고 오후 2시 30분 새천년민주당 간사인 천정배 의원이 운영회 회의실에서 한나라당 의원들과 여당 의원들이 뒤엉켜 충돌을 빚는 소란 속에서 국회법 개정안을 날치기 처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후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은 본회의장에서 철야 농성에 들어갔다. 그날 밤 나는 ‘여당이 내 말을 듣지 않고 결국은 일을 저지르고 말았구나’하는 침통한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본회의장에서 농성을 하던 야당 의원들은 아침 일찍 2개 조로 나뉘어 한 조는 의장공관으로, 또 다른 한 조는 김종호 부의장 집으로 국회 등원을 봉쇄하기 위해 향했다.
그날 아침 나의 연세대 후배인 야당의 맹형규(孟亨奎) 의원이 휴대폰으로 나에게 “지금 한나라당 의원들이 공관으로 가고 있습니다”라고 연락이 와 나는 “절대로 강행처리를 하지 않을 텐데 나를 막으러 여기에는 올 필요가 없다”고 하자 맹형규 의원은 “당의 방침이 그러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라며 전화를 끊고서는 얼마 있지 않아 한나라당 의원 30여 명이 공관에 몰려왔다.
맹형규 의원은 야당에 속해 있었으나 내가 결코 날치기 사회를 보지 않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전화를 했던 것이다.
이에 나는 한남동 의장공관에서 국회에 등원조차 하지 못한 채 야당 의원들에 의해 봉쇄(?)당하고 있었다. 물론 야당 의원들도 내가 날치기를 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형식적으로 온 것이었다. 그러나 여당 측에서는 나에게 국회법 개정안의 본회의 직권 상정을 요구하다가 나에 의해 거부당하자 사회권을 김종호 부의장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국회법 개정안의 변칙 강행처리는 물론 사회권을 이양하는 것도 새로운 국회상 정립을 바라는 국민의 뜻이 아니었기에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끝끝내 여야의 대화와 타협을 종용하였다. 이러한 나의 소신은 당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등에 정확히 기사화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