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김종호 부의장도 25일 이른 아침부터 마포구 서교동 자택에서 최병렬(崔秉烈), 이부영(李富榮) 부총재 등 의원 40여 명과 보좌진 100여 명에 의해 사실상 감금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김종호 부의장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방심한 틈을 타 옆집 당을 넘어 집 근처 식당에 3시간 동안 숨어 있던 중 오후 5시경 국회로 가기 위해 나오다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던 한나라당 이재오(李在五) 의원 등에게 발견돼 탈출(?)이 물거품되고 다시 억류되는 웃지 못 할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내가 국회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날치기는 절대 안 한다”면서 직권 상정도 거부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한 국회 운영방침을 밝힌 이후, 국회 인터넷 홈페이지(
www.assembly.go.kr)에는 ‘만섭 오빠 사랑해요’, ‘만섭 오빠 파이팅’ 등의 제목으로 나를 격려하는 이메일이 봇물 터지듯 올라왔다. 한 네티즌은 “훗날 역사는 이야기하리라. 그래도 상식은 살아 있고 희망은 있었노라”라며, “‘직권 상정은 없다’는 말은 우리 정치사에 길이 남을 명언”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오랜만에 정치권에 실낱같은 희망을 느꼈다. 입법부의 수장답게 소신을 굽히지 말아 달라”고 주문했으며, “오빠의 지조 있는 모습은 다 죽어가는 국회를 살린 생명수와 같다”는 짜릿한 말을 남긴 네티즌도 있었다.
국회법 개정안이 여야의 격돌과 ‘날치기는 절대 할 수 없다’는 나의 소신에 따라 처리되지 못한 며칠 후 아침 의장공관에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김 대통령 이 의장, 날치기를 안 하는 것도 좋으나 법대로 표결해서 다수결 원칙을 지켜야 되지 않습니까?
이 의장 그것은 원칙적으로 당연한 말씀입니다. 국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때는 문제가 없으나 국회법 개정은 국민 정서가 반대쪽이고 야당이 결사적으로 막고 있으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타협해서 문제를 풀어야죠.
김 대통령 그래도 다수결 원칙에 따라 결정해야죠.
이 의장 그러나 운영위에서 날치기를 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김 대통령 그것은 좀 성급했지만…….
이 의장 날치기는 절대 안 됩니다. 국회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이것이 국회 운영에 관련된 김 대통령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화였다. 그 후로 김 대통령은 국회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연락이 없었다. 왜냐하면 대통령 자신도 내가 국회 운영에 관한 한 대통령 말을 순순히 듣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국회 운영과 관련해서는 대통령과 나 사이에 견해차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대통령은 재적 과반수 이상의 의석 확보로 국회의 안정적 운영을 희망한 반면, 나는 의석수에 의존하기 보다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를 통해 야당을 이해시키고 설득하면서 국회를 무리 없이 끌고 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국회법 강행 처리에 이어 두 번째 나에게 닥친 시련은 당시 박순용(朴舜用) 검찰총장과 신승남(愼承男) 대검찰청 차장에 대한 탄핵소추안 처리 과정에서 일어났다.
야당은 10월 13일 검찰의 4·13 총선 관련 수사가 편파적이라며, 박순용 검찰총장 및 신승남 대검찰청 차장에 대한 탁핵소추안을 제출하였다. 이에 여당 측은 검찰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한 사실이 없으므로 탄핵소추안 요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며 내가 본회의에 보고하는 것조차 반대하였다.
그러나 나는 탄핵소추안이 제출될 경우 이를 본회의에 보고하고 보고된 때로부터 24시간 이후 72시간 이내에 표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국회법 제130조에 따라 본회의에 상정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나는 여야 총무와 탄핵소추안 처리 일정을 협의하고 11월 15일 본회의에 보고했으며 표결 처리를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나는 11월 17일, 제215회 정기국회 대정부 질문이 끝나자 탄핵소추안을 의사일정에 추가한다고 선언하고 민주당의 의원총회 요청도 있는 데다 또 표결 준비를 위해 잠시 정회를 선포하였다. 물론 나는 정회한다는 사실을 야당 총무단에 사전에 통보해 주었다.
나는 관례에 따라 정회 시간 중 의장 집무실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나 갑자기 김방림(金芳林) 의원 등 여성 의원을 앞세워 민주당의 박광태(朴光泰) · 송영진(宋榮珍) 의원 등 30여 명이 의장실로 몰려와 나의 본회의장 입장을 저지하였으며, 덩달아 한나라당 의원들도 의장실로 몰려와 여야가 대치,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나는 민주당의 정균환 총무가 정회 요청을 하면서 “자민련 의원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 그렇게만 알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여당 의원들에 의해 국회의장이 억류당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얘기치 못한 일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왜 막으려면 자민련 의원들을 막지 나를 막느냐”며 책상을 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나는 본회의장 입장을 몇 차례 시도하였으나 민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진입을 저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야 의원들과 보도진들까지 뒤엉켜 있는 상황에서는 불가항력이었다.
그때 일부 야당 의원들이 홍사덕 부의장에게 사회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했으나 여야가 격해 있는 상황에서 사회권을 넘겨도 평상시와 같이 투표 행위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야가 충돌하여 큰 불상사가 일어날 줄 뻔히 알면서 사회권을 넘기는 것은 의장으로서 무책임하다고 생각되어 사회권을 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날 밤 12시가 지나 본회의가 유회되고 모든 의사일정이 자동으로 소멸되었기 때문에 다음 날 아침 9시에 운영위원회를 열어 다시 이 안건을 의사 일정에 상정할 것을 양당 총무에게 지시하고 어둠속에서 국회를 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