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 꿔주기로 자민련 교섭단체 ...

다음 날에도 수십 명의 여당 의원들이 의장공관에 들어와 나의 국회 등원을 저지하였기 때문에 국회로 나갈 수 없었고, 의사일정 협의를 위한 운영위도 소집되지 않았기 때문에 의장으로서 더 이상 의사진행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그날 밤 12시가 넘어 민주당 의원들이 철수한 이 후 본회의장에 입장하여 사회를 볼 수도 있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법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12시가 지나면 본회의는 자동 유회되고, 안건이 소멸되기 때문에 새로운 의사 일정은 여야 협의로 국회 운영위원회에서 작성토록 국회법 제76조 3항에 규정하고 있다. 전후사정이 이러한데도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진 한나라당의 정창화 총무는 자기 당 의원총회에서 “의장이 정회를 선포한 후 왜 본회의장 밖으로 나갔는지 모르겠다”고 변명을 하여 잠시나마 야당 의원들로부터 의장이 ‘여당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을 것’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터무니없는 오해를 받자 나는 가슴이 아프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적 배신감마저 들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TV나 신문을 통해 “여당과 사전에 교감이 있었다면 벼락을 맞아 죽을 것이다”라고 여러 번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그 후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오해가 가시고 정당은 다르나 대학 후배이면서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내던 정창화 총무는 나에게 그런 오해를 받게 한 데 대해 인간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나는 사실 당시 여야의 충돌을 막기 위해 탄핵소추안을 본회의에 보고한 후 국회법에 따라 본회의 의결로 법사위에 넘겨 법사위로 하여금 탄핵소추안의 위헌 사실 여부를 조사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여 냉각기를 갖고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전에 한나라당의 정창화 총무를 설득하여 양해를 구하고 여당 측도 이를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였으나 검찰 측에서 법사위에 나와 조사받는 것을 반대하자 정치 경험이 없는 서영훈 대표와 정균환 총무는 내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국회 운영위원회 날치기 사건과 검찰 수뇌부 탄핵소추안 처리 파동은 결국 정부 · 여당으로부터 민심이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 경험이 없는 여당 지도부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슬기롭게 정국을 풀어가고자 하는 나의 충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와대 또한 내 얘기보다 총무단의 얘기에 더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때 정부·여당이 내가 시키는 대로 국회에서 당당하게 나갔더라면 국민들로부터 지금과 같은 버림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민주당 정균환 총무와 한나라당 정창화 총무를 불러 원만한 국회운영을 중재하고 있다

한편 여당 출신 의장이 여당 의원들로부터 봉쇄당하는 수모를 겪은 그날 밤 나는 서글픔을 못 이겨 의장직을 사퇴할 것을 심각히 고민하였으나 오히려 야당 일부에서 “의장이 여당과 사전 교감을 가졌을 것”이라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펼치는 바람에 의장직 사퇴 생각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그때 다시 한 번 의장의 당적 이탈도 한시바삐 제도화해야 한다고 뼈저리게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12월 27일 총 111조 9767억 원 규모의 새해 예산안이 통과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홍사덕 부위장이 당의 입장보다 국회 정상화를 위해 뒤에서 애써준 것을 나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한편 12월 30일 한나라당의 반대로 국회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를 위한 국회법 개정이 무망해지자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위해 배기선(裵基善), 송석찬, 송영진 의원 등 민주당 소속 3명의 의원이 자민련에 입당하였다.

‘의원 꿔주기’란 비판 속에 자민련 소속 강창희(姜昌熙) 의원은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필요한 서명 날인을 거부했고, 자민련은 새해 1월 10일 강창희 의원을 제명한 후 다시 민주당 장재식(張在植) 의원의 입당으로 간신히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했다.

자민련이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한 이후 민주당과 자민련, 그리고 민국당이 3당 정책연합을 내세운 가운데 ‘강한 여당론’을 들고 나왔으나 ‘강한 여당’은 4월에 있은 국무총리 해임건의안 처리 때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의 경찰의 노동자 유혈 · 폭력 진압사건에 대한 문책 등을 이유로 2001년 4월 10일 이한동 국무총리 및 이근식(李根植) 행정자치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제출하였다.

나는 이 안건 역시 법에 따라 4월 28일 제220회 임시국회 10차 본회의에 보고했고 4월 30일 제11차 본회의에서 표결에 부쳤다.

투표는 일단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표결 결과에 자신이 없던 민주당은 간부들과 적극적인 투표 참여 의사를 가진 의원 38명만 투표에 참여하고 나머지는 그대로 의석에 앉아 있었다. 이에 한나라당이 강하게 반발함으로써 끝내 개표가 이뤄지지 못하고 법에 따라 투표함은 봉인되었다가 폐기되었다.

당시 나는 민주당의 이상수(李相洙) 총무에게 필사즉생(必死卽生), 죽을 각오로 정정당당하게 투표에 임하라고 했다.

3당이 정책 연합을 해서 강한 여당이라고 강조해 놓고 막상 투표할 때는 불참한다면 국민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강한 여당은 수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 나의 일관된 소신이었다.

당시 만일 여당이 ‘총리가 대우사태로 물러난다는 것은 명분이 없고, 또 행자부장관은 임명된 지 며칠 되지 않아 바로 물러나게 하면 혼란이 생기므로 나라를 생각해서 물러나면 안 된다’는 식으로 자신 있게 야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당당하게 투표에 임했더라면 오히려 부결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데도 여당은 처음부터 자신 없이 우물쭈물 대처함으로써 또 다시 국회 파행을 야기하고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