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이 정정당당하게 투표를 안 한 것도 잘못이지만 강경파들에게 이끌려 개표를 방해한 야당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개표를 해보면 찬성이 적어도 133표 이상이 되고 반대는 투표에 참가한 여당 의원 38표밖에 안 되어 대외적으로는 한나라당 원내 전력의 승리로 비쳐지고 오히려 여당 의원들의 선별투표 행위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었는데도 야당은 개표를 방해함으로써 국민들로부터 여당과 똑같은 비판과 불신을 받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했으니 전략 부재는 여나 야나 마찬가지였다.
16대 국회 두 번째 정기국회를 눈앞에 두고 여야 간에 언론사 세무조사에 대한 국정조사 논란이 뜨거운 가운데 한나라당은 2001년 8·15 평양 통일대축전에 참석한 것과 관련, 임동원(林東源) 통일부 장관과 신건(辛建) 국정원장의 해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한나라당은 “8·15 평양 축전에 참석한 사람들이 북한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상징하는 기념탑 앞에서 개최된 행사에 참석한 것은 북한이 추진하는 통일을 바라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나라당은 또한 “정부는 이런 가능성에 대해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음에도 묵인 내지 방조했다.”며 책임자의 문책을 요구하고 나섰고, 자민련도 방북단의 행위에 대해 “국법을 어기고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포기한 이적 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마땅히 사법 처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민주당도 “정부 당국이 기념탑 앞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고 방북을 허용했는데도 일부 인사들이 이를 무시하고 행사에 참석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장관에 대한 문책은 반대했다.
한나라당은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자진 사퇴나 정부의 경질 조치가 없자 8월 24일 임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민주당은 한나라당의 해임안 제출은 ‘햇볕정책에 대한 도적’으로 간주하고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한편 자민련은 임 장관이 자진 사퇴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8월 29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 출석한 임 장관은 8·15 방북단의 돌출행동에 대해서는 사과하면서도 거취 문제는 자신이 판단하기보다는 임명권자의 뜻에 따르는 게 도리라며 자진해서 물러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임 장관 해임안을 둘러싸고 일전불사의 결의를 다지는 가운데 자민련은 임 장관의 자진 사퇴를 공개적으로 주장했고, 청와대는 임 장관의 해임 요구는 햇볕정책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며 반대했다. 결국 이 문제는 DJ와 JP 간 정면 대결로 비화되었다.
어떤 안건이든 국회법에 따라 공정하게 처리한다는 소신을 갖고 국회를 운영해 온 나는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도 법에 따라 원칙대로 처리했다. 9월 3일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은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공조 속에 가결되었고 결국 DJP 공조도 또다시 붕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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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공조로 임동원 통일부장관 해님건의안이 가결됨으로써 DJP공조도 막을 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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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자민련 출신 정부 각료는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민주당에서 자민련으로 당적을 옮겼던 4명의 의원들도 민주당으로 복귀함으로써 자민련은 원내 교섭단체의 지위를 상실한 채 정기국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민련 당적을 가진 이한동 국무총리는 총리직을 지키기 위해 자민련 당론에 따르지 않았으며, 이에 배신감을 느낀 자민련은 그를 제명하고 말았다. 공당의 총재가 자기가 속한 당원들로부터 제명을 당한 것은 우리나라 정치 사상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한편 임동원 장관은 해임건의안이 가결된 직후인 9월 7일에 단행된 개각에서 통일부 장관을 사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그를 다시 청와대 외교안보통일특보로 임명하여 계속 남북문제를 다루게 했다.
이후 국회는 또 한 차례 어려운 고비를 맞게 되었다. 정기국회 내내 잇달아 터져 나온 각종 비리 의혹사건으로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신승남 검찰총장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에 한계를 두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으로 정치권을 자극했고, 국회 법사위는 1표 차로 검찰총장 출선 요구 건을 가결시켜 신승남 검찰총장의 국회 출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신승남 검찰총장은 검찰총장이 국회에 출석한 전례가 없었다는 이유로 끝내 법사위의 요구를 거부하고 국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이에 한나라당은 12월 5일 신승남 검찰총장에 대해 정치적 중립 위반, 국회 증인 출석 위반, 권한 남용 금지 위반, 청렴 의무 위반 등을 이유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나는 당시 신승남 검찰총장이 국회에 출석하는 것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신승남 총장이 법사위원회의 요구대로 국회에 출석해서 문제된 발언에 대해 해명했더라면 탄핵소추안은 발의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안건도 국회법에 따라 원칙대로 처리했다. 나는 여야가 의사 일정에 합의하지 못함에 따라 원칙대로 12월 7일 오후 2시 이 안건을 본회의에 보고했으며, 8일 오전 정기국회 마지막 본회의에 의장 직권으로 상정했다.
자민련이 탄핵안 반대 방침을 밝힌 데다 민주당의 표결 불참 가능성이 있는 가운데 표결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자민련은 전원 퇴장했고 민주당은 본회의장을 지키며 투표에 불참했다.
한나라당은 와병 중인 손태인(孫泰仁), 김태호(金泰鎬) 의원도 출석시켜 136명 전원이 참석하였고 무소속의 정몽준 의원과 민국당 강숙자 의원이 투표에 참여하여 의결 정족수(137명)를 간신히 넘겼다. 투표를 종료하고 개표에 들어가려 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갑자기 뛰쳐나와 “민주당 감표위원이 없다”며 개함을 저지했다.
이에 민주당 의원들은 “탄핵안이 불법이었기에 처음부터 불참했다. 투표 때는 가만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문제 삼느냐”고 맞서다가 퇴장하고 말았다.
여야 간에 승간이가 벌어지고 장내가 소란한 상황에서 개표를 계속할 경우 야당 의원과 국회 개표 종사 직원 간의 물리적 충돌마저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나는 부득이 개표 유보를 선언하였다.
사실 이날 개표 무산은 여야 모두 속으로는 개표를 원하지 않는 당리당략 때문이었다. 여당은 감표위원을 내지 않고 퇴장하였으며, 야당도 여당이 감표위원을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표를 끝까지 반대한 것은 여야 모두 표결 결과에 대해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