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가 당리당략과 대권 전략으로 기 싸움을 계속하여 국회가 여러 차례 대립과 격돌을 겪었지만 나는 국회를 이끌고 있는 의장으로서 16대 국회를 여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꿋꿋하게 지켜왔다. 그래서 나는 국익과 민생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할 때는 여야 어느 한쪽이 국회 본회의에 참석하지 않는 경우에도 국민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과감히 의사봉을 들기도 했다.
2000년 7월 하순,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 완화를 위한 국회법 처리를 둘러싸고 소란과 파행을 빚은 끝에 제213회 국회가 자동 폐회되고, 곧이어 민주당과 자민련의 요구로 제 214회 임시국회가 소집되었으나 여야는 국회법 처리과정에서의 격돌로 빚어진 앙금을 씻지 못해 국회 정상화 협상은 무위로 돌아가고 여야의 정쟁 속에 민생은 외면당하고 있었다.
한시바삐 처리해야 할 민생 현안들이 많이 있었으나 그중에서도 약사법 개정안과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촉구 결의안은 본회의 처리가 시급한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약사법 개정안은 여야가 완전 합의를 보아 7월 21일 이미 보건복지위원회 안으로 본회의에 회부되어 있었고 당장 8월 1일부터 의약분업이 실시되기 때문에 국민들은 의료대란이 다시 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또한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촉구 결의안은 야당이 제안한 것으로 바로 8월 2일부터 한 · 미 정부간에 협상이 시잘될 예정이었다.
따라서 나는 7월 31일 제214회 임시국회 본회의에 한나라당 의원들이 참석하여 시급한 민생 문제를 여야가 함께 다뤄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의원들이 끝내 본회의에 불참함으로써 나는 이 2개의 안건을 단독으로 처리하였다. 나는 이 자리에서 “야당이 없는 가운데 저도 부득이 국민과 나라를 위해 시급한 민생 현안을 다루게 된 것을 국민들이 양해해 달라”고 호소했다. 지금도 나는 ‘국회는 여당의 국회도 아니고 야당의 국회도 아니며 오직 국민의 국회’인 만큼 언제나 국민의 편에 서서 의사봉을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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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 6월 5일, 제16대 국회개원식 / 연설을 끝낸 김대중 대통령과 국회의장으로서 악수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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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9월 1일 16대 첫 정기국회가 열렸으나 여야 정쟁으로 국회가 공전을 거듭하자 9월 8일 나는 또 한 번 한나라당 의원들의 불참속에 ‘윤영철(尹永哲) 헌법재판소장 및 권성(權誠) · 김효종(金曉鍾) 헌법재판관 임명동의안’을 처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신임 헌법재판소장 및 재판관의 임기가 당장 9월 15일부터 개시되고 14일이 바로 추석연휴 뒤 끝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임명동의안 처리에 차질이 생길 경우 헌법기관의 공백상태라는 국가적 중대 사태가 초래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국군 부대의 UN 동티모르 파견 연장 동의안’도 마찬가지였다. 이 안건이 9월 말까지 처리되지 못할 경우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거나 또는 부대를 철수시켜야만 하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9월 29일 단독국회에서 이 안건을 처리하였다.
여야가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민생과 국익을 위해서는 머리를 맞대야 한다. 나는 국민이 원하지 않고 야당이 극력 반대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결코 일방적으로 의사 진행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민과 나라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안건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기다리다가 불가피한 경우에는 국민의 양해를 얻어 단독으로라도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국회는 바로 국민의 국회이기 때문이다.
2002년 새해 복두부터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으로 북한과 미국 간에 긴장이 고조되고 한국과 미국 사이에도 미묘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시점에 부시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이루어졌다.
부시 대통령의 방한을 하루 앞둔 2월 18일 국회는 정치 분야 대정부 질문을 벌였다. 국민과 세계의 관심은 미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한·미 관계와 대북 정책 조율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쏠려 있었다. 그런데도 이날 대정부 질문에 나선 여야 의원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상대방 흠집 내기에 골몰하여 김대중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의 가족을 겨냥해 서로 직설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민주당 송석찬 의원은 이회창 총재와 두 아들은 물론 부친의 전력까지 들먹이며 이 총재의 정계 은퇴를 촉구하였다. 민주당 송석찬 의원이 이 총재와 그 가족 문제를 언급할 때 한나라당 의원들이 단상으로 올라와 원고를 빼앗으며 송석찬 의원을 밀어내고 발언을 막는 사태까지 벌어졌으나 가까스로 예정된 의원들의 정치 분야 대정부 질문은 마쳤다. 그러나 오후에 의원총회를 가진 여야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대립하였다.
야당은 발언 중인 동료 의원의 원고를 빼앗고 단상에서 밀어낸 야당 의원들의 행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으며 한나라당이 사과하지 않으면 대정부 질문을 계속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야당은 이회창 총재를 ‘악의 뿌리’, 부시 대통령을 ‘악의 화신’으로 표현한 송석찬 의원의 발언은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발언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대립하였다.
여야의 팽팽한 대치 끝에 18일 오후 국회는 파행을 겪었으며, 여야 간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의장인 나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여야가 절충점을 찾지 못해 19일 오전에도 본회의는 속개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의원들은 의사 정족수가 되었으니 국회법에 따라 본회의를 속개할 것을 나에게 강력하게 요구했다. 나 또한 마냥 본회의 속개를 미룰 수만은 없었다.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여 정상회담을 하는 날 국회가 여야 격돌로 문을 닫아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또한 송석찬 의원의 ‘악의 화신’ 발언에 대해 우리 정부가 그것은 송석찬 의원 개인의 의견일 뿐 결코 여당이나 정부의 공식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답변을 통해 충분히 해명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되므로 국회를 열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한나라당 이재오 충무를 설득하여 그 전날 송의원의 발언 도중 야당 의원들이 방해한 데 대해 사과하게 하고 부득이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한나라당과 자민련 의원만으로 본회의를 속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민주당이 불참한 가운데 본회의 사회를 보자 여당 일각에서는 ‘의장이 야당 편을 든다’ 며 불만을 토로했지만 나는 여당의 편도, 야당의 편도 아니며, 오직 국민의 편에 서서 국익을 위해 의사봉을 들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