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가운데도 16대 국회 전반기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 국회의 고질병이던 날치기를 없앤 것은 커다란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또한 16대 국회 전반기에는 여야 대립과 격돌 속에서도 과거 그 어느 국회보다 일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다.
16대 개원 이후 전반기 2년간 법률안 434건을 포함하여 701건의 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같은 기간 13대 425건, 14대 499건, 15대 628건에 비해 현저히 늘어난 것이다. 의원 법률안 발의 건수도 지난 2년 동안 900건으로 같은 기간 13대 469건, 14대 120건, 15대 452건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특히 제277회 임시국회 마지막 날인 2002년 2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의장의 당적 이탈’과 ‘국회의원 자유투표제’를 명문화한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은 헌정사에 길이 남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국회의장의 당적 이탈은 제헌국회 이래의 숙원이고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 온 소신이었다. 그리고 의장은 특정 정파의 당리당략을 떠나 국민의 편에서 공정하게 국회를 운영해 달라는 국민의 소리이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이미 마음으로부터는 당적을 떠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오직 국민과 나라를 위해 국회를 공정하게 운영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해왔다. 그러나 의장이 아무리 여야에 치우침 없이 국회를 올바로 운영하려 해도 법적으로 당적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정파의 이해와 유불리(有不利)에 따라 본의 아니게 오해와 불신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의장의 당적 이탈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명문 규정을 신설함으로써 우리 국회는 헌정 사상 새로운 획을 그었다. 국회는 또한 오랫동안 여야 의원들의 소망이자 국민의 바람이었던 ‘자유투표제’를 명문화함으로써 의원 개개인이 국민의 대표자로서 소속 정당의 의사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투표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나는 개정된 국회법이 발효됨에 따라 3월 8일 그동안 소속해 있던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함으로써 ‘당적을 갖지 않은 최초의 국회의장’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으니 참으로 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대 제도 개혁은 16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이 법정 기일을 넘기고 의장단 선출이 당론 투표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상당 부분 빛이 바래고 말았다. 여야는 16대 국회 후반기 원 구성 시한인 5월 25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도 국회의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기 싸움과 힘겨루기로 어떤 타협점도 찾지 못한 채 국회를 공전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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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1년 2월 8일 방한 중 국회에서 연설하고 있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맞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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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빙의 의석 분포(당시 전체 의석 수 269 : 한나라 133, 민주 115, 자민련 14, 무소속 7)에다 대통령까지 민주당을 탈당한 상황인지라 여야의 개념조차 모호한 상태에서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은 다수당으로서 국회의장직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반면 ‘정책 여당’을 내세운 민주당은 책임 있는 국정 운영을 위해 의장직을 양보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자민련 역시 최소한 부의장과 일부 상임위원장을 차지하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무리 국회가 정쟁의 본거지가 되고 대권 경쟁의 장으로 전략하였다고는 하나, 원 구성만큼은 제때 해야 되지 않겠는가. 입법권을 가진 국회가 스스로 만든 국회법조차 어겨서야 되겠는가. 시급한 민생 현안이 산적해 있는 데다 당장 5월 31일부터 치러지는 월드컵 행사시간 중 외국의 귀빈을 맞아야 할 국회가 의장단 없이 공백상태가 된다면 국가 체면은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5월 20일 3당 총무 회담을 주선했다. 이 자리에서 나는 “국회법을 개정해 국회의장의 당적을 이탈시킨 마당에 각 당의 의장직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정쟁을 벌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개탄하고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의장단을 자유 투표로 선출하자”고 제안했다.
나의 제안에 자민련의 김학원 총무만 찬성했을 뿐, 한나라당의 이규택(李揆澤) 총무는 “원칙적으로는 찬성하지만, 당내 논의를 거쳐야 한다”고 발뺌했고, 민주당의 정균환 총무도 즉답을 회피하였다. 양당 모두 국회보다 당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식물국회’는 막아야 한다면서 여야 타협을 촉구하였으나 여야의 당리당략과 기 싸움으로 후반기 원 구성 법정 시한인 5월 25일을 넘기고 16대 국회 전반기 임기 만료일인 29일까지도 여야는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5월 29일 의원총회에서 박관용 의원을 의장 후보로 선출한 뒤 단독국회를 강행하려고 했으나 민주당과 자민련, 무소속 의원들이 참석하지 않은데다가 본회의장에 나타난 한나라당 의원들마저 90여 명에 그쳐 본회의 개회 자체가 무산되고 말았다.
국회가 후반기 원 구성을 못해 ‘진공상태’인 가운데 31일 의사당 중앙 홀에서 열린 ‘국회 개원 제54주년 기념식’에 직전 의장 자격으로 참석한 나는 기념사에서 “나는 아직도 후반기 원 구성을 못한 것은 국회가 스스로 법을 어기는 것이며 국민을 모독하는 행위인 만큼 지금 당장이라도 국회법에 따라 자유투표로 의장을 선출해 달라”고 재차 촉구했다. 그리고 “자리보다 언제나 명예를 귀중하게 생각해 온 나는 아무런 미련도 없이 의장직을 떠난다”고 나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그 당시 여야 의원들 사이에는 그동안 국회를 공정하게 운영해 온 내가 계속 의장직을 맡아줄 것을 바라는 분위기도 있었으나 여야 간 힘겨루기로 원 구성이 늦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조속한 원 구성을 위해 내 태도를 분명히 밝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의 합리적인 제안과 간곡한 촉구는 여야의 기 싸움과 힘겨루기 앞에서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참으로 안타깝고 자괴감마저 들었으며, 여야는 원 구성을 결국 월드컵 이후로 미루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