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4강 신화 속에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성공리에 끝나자 여론을 의식한 여야는 7월 8일에야 겨우 의장단 선출하였으나 국회법에 명시된 자유 투표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나라당은 협상전략상 ‘박관용 국회의장 후보 내정’을 철회하고 형식적으로는 자유 투표를 한다고 했으나 속으로는 철저하게 당론 투표를 하였고 민주당은 치밀한 전략도 없이 김영배 의원을 후보로 내세워 당론 투표로 맞섰던 것이다.
그 결과 재석 258명 중 한나라당 박관용 의원이 136표를 얻어 112표를 얻은 민주당 김영배 의원을 누르고 의장에 당선됐다(민주당 주순형 의원 6표, 민주당 김충조(金忠兆) 의원 1표, 자민련 김종호 의원 1표, 기권 1표, 무효 1표). 최다선 의원으로서, 그리고 직전 의장으로서 후임 의장단을 선출해주고 깨끗이 물러난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본회의 사회를 맡은 나는 고별사를 통해 그동안의 나의 심경을 밝혔다.
“후반기 원 구성이 늦어진 데 대해 먼저 국민에게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그동안 이 사람이 16대 전반기 국회의장의 임기를 다 채우는 데 협조해 주신 여야 의원 여러분께 마음속 깊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저는 지난 2년간 어려운 고비 때마다 의장직 사퇴서를 항상 가슴속에 품은 채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국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소신껏 국회를 운영해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그 숱한 고비를 넘기고 임기를 모두 마친 데 대해 여야 의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이 국회가 여야 어느 정당의 국회가 아니라 바로 국민의 국회라는 소신을 갖고 공정하게 국회를 운영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의사봉을 칠 때도 한 번은 여당을 보고, 한 번은 야당을 보고,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방청석을 통해 국민을 바라보면 향심의 의사봉을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때로 여당과 야당의 원래 전략에 부합되지 않을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오해와 불평을 사기도 했습니다. 이 점 의장직을 떠나는 이 자리를 빌려 개인적으로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후반기 의장으로 새로 선출된 박관용 의원께서는 11대 국회 때부터 내리 6선을 하면서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해오신 훌륭한 분으로 마음 든든하게 생각합니다.
한 가지 부탁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신임 박관용 의장께서는 날치기 없는 공정한 국회 운영의 전통을 계속 지켜주실 것을 당부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이 사람은 영원한 의회인 으로 국회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정파를 초월하여 국회의 권위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다시 한 번 그 동안 국회 운영에 협조해 주신 여야 의원과 국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마지막으로 박관용 신임 의장에게 의사봉을 넘긴 후 의장석을 천천히 내려왔다. 이때 의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으며 나는 오른손을 흔들어 의원들에게 답례를 했다. 그러자 박수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양손을 번쩍 들어 의원들에게 인사했다. 나는 이 감동적인 장면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회를 만들겠노라고 몇 번이나 다짐했던 2년 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국민과 역사 앞에 ‘날치기 없는 국회, 공정한 국회의장’의 약속을 지킨 데 대한 가슴 벅찬 기쁨도 느꼈다. 또한 앞으로 언제 어디서든 의회인 으로서 국회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할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의장 선출이 국회법에 따라 자유투표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여전히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특히 여야 젊은 의원들조차 자유 투표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기백을 보여주지 못한 채 당론 투표에 함몰되어 버리는 광경을 보는 나의 마음은 서글프기만 했다.
아무튼 우리 국회가 정파 간의 대립과 대결의 정쟁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민의의 전당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제 의원들 각자의 의식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특히 국회의원들이 개정된 국회법에 따라 당론에 기속되지 아니하고 양심에 따라 자유 투표를 실천해 나갈 때 우리 국회는 성숙된 국민의 국회로서 박수를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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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1월 22일 상해임시정부 청사를 방문해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 왼쪽부터 정의화, 정범구, 김학원 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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