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으로 2002년 정기국회를 앞당겨 마무리한 11월 중순 어느 날 나는 단풍으로 붉게 물든 의원동산의 낙엽을 밟고 거닐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나는 고뇌 끝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조용히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사실은 나도 한때 기회가 오면 조국 통일과 국가 발전을 위해 내 한 몸 던져 나의 경륜과 철학을 펼칠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나의 국회의장 임기 말인 5월 29일 훨씬 이전부터 젊은 정치인들이 대권 경쟁을 벌일 뿐만 아니라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가 이미 3월부터 시작된 상황에서 내가 젊은 후배들과 이전투구를 할 수도 없을뿐더러 임기 마지막까지 국회의장직에 충실하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우리 정치권에 소신과 경륜을 가진, 그리고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원로 정치인이 한 사람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선거 초반에 각 후보 측에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나는 국회의장 시절 초당적으로 국회를 운영했듯이 이번 대선에서도 어느 한쪽에 기울기보다 중심을 잡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완곡히 거절한 일도 있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극적인 한 편의 드라마였다. 그리고 대통령은 역시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실감나는 선거였다.
대통령 선거전은 후보 등록 직전까지만 해도 이회창 · 노무현 · 정몽준 3자 대결 구도였다. 월드컵 4강 바람을 타고 정몽준 바람이 거세게 일면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급격히 떨어졌다. 여론 조사 기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이회창 · 정몽준 두 후보의 양강 구도가 한때 지속되다가 정몽준 후보의 바람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하여 후보 등록을 얼마 앞두고는 이회창 1강에 노무현 · 정몽준 2중 구도가 형성되었다.
노무현 · 정몽준 두 후보의 단일화 없이는 이회창 후보를 이지기 못한다는 것이 당시의 대세였다. 노 · 정 두 후보의 단일화는 참으로 어려우 보였다. 그러나 ‘후보 단일화 없이는 필패’라는 위기감이 팽배해지자 양 후보 진영은 절충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마침내 11월 9일에는 민주당과 국민통합21 양당 간의 후보 단일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4일에는 노 · 정 두 후보가 심야에 국회에서 만나 ‘일반국민 대상 여론 조사로 단일화’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그 이후 한때 후보 단일화 방식 등을 둘러싸고 합의 파기 위기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의 요구조건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여 22일 밤 단일화 재협상이 타결되었다. 이어 23일 노 · 정 두 후보 간의 TV토론이 이루어졌으며 24일 밤에는 마침내 여론조사에 의한 후보 단일화가 사상 초유로 이루어졌다.
|
|
| ▲ 16대 대선에서의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 |
|
여론조사 결과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차이로 이겨 단일후보로 확정되었나. 승리를 확신했던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측은 커다란 충력을 받았으나 처음에는 여론조사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였다.
이리하여 선거전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 간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으며 단일화에 극적으로 성공한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노 후보는 후보 단일화의 시너지 효과를 얻어 후보 등록 직전 각 언론사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5~9% 포인트 차이로 앞서기 시작했으며 공식 선거전에 돌입한 이후에도 여론조사 기관과 시기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었으나 노무현 후보의 우위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선거일을 불과 2시간 앞두고 정몽준 대표가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갑자기 철회함으로써 선거판을 크게 출렁거렸다.
이날 밤 이회창 후보 측에서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러나 노무현 후보 측에서는 정 후보의지지 철회가 시간적으로 보아 큰 타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노 후보 지지표를 결집시키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선거 결과가 민주당의 노무현 후보가 1201만 4277표를 얻어 1144만 3297표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57만여 표 차이로 누르고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무현 후보는 총 유효투표 수의 48.91%를 획득하여 46.59%를 획득한 이회창 후보를 2.32%포인트 차로 제치고 승리했던 것이다.
투표 당일 각 방송사의 출구 여론조사 결과 오후 1시까지는 이회창 후보가 다소 앞서갔으나 오후 들어 젊은 20~30대 유권자들이 휴대폰과 인터넷을 통해 투표를 독려하며 대거 투표장에 몰려감으로써 역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승리이며,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보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고 적절히 대처한 결과로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노무현 후보 측이 내세운 “낡은 정치 청산론‘이 이회창 후보 측이 내세운 ‘부패정권심판론’보다 유권자들에게 더 실감나게 피부에 와 닿았다는 것이다. 이회창 후보 측은 부패 정권 심판을 부르짖으면서도 과거 부패에 관련된 인사들이나 철새 정치인을 무분별하게 끌어들임으로써 국민의 마음을 사는 데 실패했으며, 오히려 노무현 후보 측의 낡은 정치 청산론에 무게를 실어준 셈이 되었다.
또한 노무현 후보가 국민들의 마음을 살 수 있었던 것은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대선이 끝날 때까지 어려운 고비 때마다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