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당선된 직후 그가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7월 24일 나는 노 후보의 제의로 여의도 63빌딩 55층 양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한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노 후보에게 “노 의원이 대통령 후보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우리 같은 사람은 한평생 정치를 해도 대통령 후보가 못 되었는데 노 후보는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큰 영광으로 생각하고 대통령이 안 되어도 좋으니 지나치게 표를 의식하는 행동은 안 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필사즉생必死卽生, 선거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임하시지요. 그러면 길이 열릴 것입니다”라고 조언한 적이 있다.
결국 노 후보가 대선과정에서 시종 당당한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준 것이 대통령에 당선된 큰 요인이 된 것 같다.
한편 이번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많은 정객들이 노무현 후보나 이회창 후보에 대해 지지를 선언했다. 그 중 특히 대선 막바지에 이르러 여론조사 결과 이회창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자 노정객 몇 사람이 이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여 많은 국민들은 이를 의아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동안 줄곧 이회창 후보를 비판해 왔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11월 20일 일본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후보는 내가 대통령 때 감사원장과 총리로 임명한 사람”이라며 “나는 한나라당을 지지한고”고 이 후보를 지지를 표명했다.
또한 2000년 16대 총선 직전 이 후보로부터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한 뒤 민국당을 창당하여 대표직을 지낸 김윤환 씨도 11월 29일 이회장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그는 줄곧 “이회창이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며 극구 반대 입장을 견지해 왔으나 대선이 임박해지자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이 후보와의 불편한 관계는 해소했고, 국가 발전을 위해 이 후보가 되는 것이 옳다는 게 나의 소신”이라며 이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또한 DJ정권 하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낸 박태준 씨도 느닷없이 11월 26일 한 공개모임에서 “그동안 민주화를 외치고서 정권을 잡은 분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화는 권력을 잡는 수단이었지 국민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두 대에 걸쳐 명확히 확인했다”는 요지의 발언을 하며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아무튼 나는 새 대통령이 우리 사회의 세대간, 지역 간, 계층 간 갈등을 치유하여 국민 통합을 이룩하고 정치개혁을 이끌어내기를 충심으로 바라고 있다. 또한 무엇보다도 경제를 안정시켜 국민들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특히 미국을 비롯한 한반도 주변 4강과의 협력을 통해 북한 핵 문제를 비롯한 남북문제를 평화적으로 슬기롭게 풀어나가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그리고 나는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정치 원로로서 국가발전과 국ㅁ니 화합을 위해 국민의 편에 서서 직언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2003년 1월 7일 민주당의 개혁파 의원모임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과잉의욕은 없는지, 정실인사는 없는지, 혹시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으로 흐르지는 않는지 걱정하고 충고하는 것도 개혁”이라고 말하고 “개혁은 국민의 참여 속에 이루어져야 하며 결코 배타적 개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다음 날 아침 《동아일보》는 나의 말을 인용한 ‘과잉 행보 충고도 개혁이다’라는 제하의 사설에서 “이 전 의장이 많은 국민의 우려를 대변했다”고 뒷받침하고 “노 당선자 측은 이쯤에서 이 전 국회의장의 지적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
| ▲ 노무현 당선자와 임채정 대통령직 인수위원장등이 현판식을 하고 있다 |
|
노무현 대통령은 앞으로 개혁을 하되 일부 젊은 세력만이 참여하는 ‘배타적 개혁’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참여 속의 개혁’을 해야 할 것이다.
개혁이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도 안 되며 단순히 구호를 위한 개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참다운 개혁이란 ‘국가의 발전’을 위하고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결코 서둘러서도 안 되며 개혁은 조용히 순리대로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세대교체를 하되 단순한 연령의 교체가 아니라 의식의 교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 당선 이후 이 나라 50대 이상 연령층 중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심지어 의욕 상실에 빠지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진정한 국민 통합과 국가 에너지 결집을 위해서도 50대 이상의 경험과 경륜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야 할 것이다.
2월 25일은 대통령 취임식이 있는 날이었다. 노 대통령이 취임한 2003년 2월 25일에도 국회는 어김없이 여야 대치 끝에 파행으로 얼룩지고 말았다.
국무총리 고건 임명동의안과 한나라당이 제출한 대북 비밀 송금 의혹 사건 관련 특검법안 처리 순서를 둘러싸고 여야가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었다.
민주당은 25일 본회의에서 고 총리 후보자 임명 동의안을 국회 관례에 따라 먼저 처리하고 그 후 특검법안을 처리하자는 입장이었으나, 한나라당은 25일 중 특검법안을 먼저 처리한 뒤 임명동의안을 표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민주당은 인사 안건 우선 처리는 오랜 국회 관례이므로 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을 먼저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한나라당은 ‘특검법안을 나중에 상정하면 민주당이 몸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특검법안을 총리 임명동의안보다 먼저 처리한다는 당론을 고수했다.
나는 이미 개인적으로는 국민이 요구하는 한 특검제를 해야 한다(동아일보 2월 12일자 보도)는 입장을 밝힌 바 있거니와 25일과 26일 두 번에 걸친 민주당 의원총회에서도 나는 특검법안을 다룰 때 절대 몸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여당이 특검법을 무조건 반대하지 말고 특검법 내용에 대해 야당과 협상하는 것이 나라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원내 전략에도 유리하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또한 25일 의원총회 도중에는 의원들의 요청에 의해 김상현金相賢 · 김원기 고문, 김태식 국회부의장 등과 함께 박관용 의장을 방문하여 “인사 관련 안건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국회의 오랜 관행을 지킬 것”과 “그동안 특검이나 국정조사 등은 모두 여야 합의로 처리해 왔으므로 이번 특검법도 여야가 합의 처리할 수 있도록 중재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 후 박관용 의장은 양당 총무를 불러 의사일정의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여당이 또한 청와대 대통령 취임 축하 만찬을 이유로 본회의를 하루 연기할 것을 요청함으로써 이날 본회의는 유회되고 말았다.
다음 날인 26일 오후 2시 30분경 다시 본회의가 열렸으나 박관용 의장이 한나라당이 제출한 특검법안을 총리 임명동의안보다 먼저 다루기 위한 의사일정 변경동의안을 처리하려고 하자 여야 간에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