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보다 못한 나는 전직 국회의장으로서 국회의 원만한 진행과 여야 충돌을 막기 위해 의사 진행 발언에 나섰다.
나는 발언을 통해 인사 관련 안건을 먼저 처리하는 제헌국회 이래의 오랜 관행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민주당이 물리적으로 특검법 통과를 저지한다면 내가 정치 생명을 걸고 막겠다”고 비장한 결의를 밝혔다. 그리고 여당보다 50여 석이나 많은 한나라당에 “당당하게 그리고 순리에 따라 총리 인준안을 먼저 표결하고 그 다음 특검법 처리에 임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야당은 고집불통이었고 여야 의원들의 의사 진행 발언이 계속되어 여야 간에 격론이 벌어지자 박관용 의장은 오후 4시께 “앞으로 30분 후에 안건을 처리하겠다”면서 정회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정회 도중 민주당이 다시 의원총회를 열어 입장을 정리하는 동안 오후 4시 30분이 지나자 박 의장은 본회의장에 이미 들어가 있는 한나라당과 자민련 의원들만으로 본회의 속개를 선언, 의사 일정 변경 동의안을 통과시킨 뒤 일사천리로 특검법안에 대한 전자투표를 실시하고 말았다.
결국 특검법안은 민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162명의 의원이 표결에 참여하여 찬성 158표, 반대 1표(한나라당 김부겸金富謙 의원), 기권 3표(박 의장, 김홍신金洪信 · 김영춘金榮春 의원)로 가결되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박관용 의장이 민주당이 의원총회를 하는 도중 야당 의원들만으로 특검법안을 처리한 데 대해 분노와 실망을 감추지 못했으나 ‘일단 새 정부를 출범시키자’는 당론에 따라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처리에 참여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고건 국모총리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은 가 163표, 부 81표, 무효 2표로 가결되었으나 의장단과 여야 지도부의 정치력 부재와 여야 간의 불신으로 새 정부 출범 초기부터 국회는 또다시 파란을 겪고 말았다. 그리고 민주당은 2월 28일 ‘박 의장이 한나라당의 편을 들어 편파적으로 본회의 사회를 보았다’는 이후로 박관용 국회의장에 대한 사퇴 권고결의안을 제출했다.
내가 주장한 대로 의장이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총리 임명동의안을 먼저 처리하고 특검법안을 처리했더라면 그 후에 ‘야당이 일방적으로 특검법안을 통화시켰다’는 비판을 면할 수 있었을 것이며 여당 측이 특검법 거부권 운운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여당도 내 주장대로 특검법을 처음부터 무조건 반대할 것이 아니라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들어 특검법 내용에 대해 야당과 진지하게 타협 했더라면 당을 위해서도 오히려 실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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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본회의에서 대북송금 특검법안이 민주당의원들이 불참한 채 한나라당 단독으로 통과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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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장석이 아닌 발언대에서 연설을 한 것은 과거 당의 총재나 대표로서 당 대표연설을 한 이후 처음이었다. 8선 의원이자 국회의장을 지낸 사람이 의사 진행 발언을 한 것도 의정 사상 내가 처음이었다.
나는 진정한 ‘의회주의자’라면, 또 진성한 ‘원로 정치인’이라면 선수(選數)나 체면에 관계없이 나라의 중대사 앞에서는 초선 위원 못지않게 앞장서는 것이 참 정치인의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여야의 원내 전략이 강경파에 의해 주도되는 경우 국회는 여야 격돌이 반복되고 국민의 불신은 더욱 깊어질 것이다.
나는 전직 의장으로서 나라와 국회의 앞날을 생각하면 걱정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정치인은 모름지기 내일을 위해 인내할 줄 알아야 하고 ‘역지사지(易地思之)’ 하며 ‘대도재중용(大道在中庸)’ 임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의 원칙은 다수결이나 국회의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여야 모두 힘의 논리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 2년간 정치적으로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특검법 문제와 재신임 국민투표 문제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두 문제에 대해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어려워지고 리더십이 크게 훼손되었다.
먼저 노무현 대통령은 특검법에 대해 편협하고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국회 및 야당과 자주 충돌을 빚으며 정국 경색 및 국정 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첫 특검법인 대북송금 특검법이 3월 15일 공포되고 4월 16일 송두환(宋斗煥) 특검팀이 출범하여 2003년 6월 25일까지 70일간 수사를 벌였다.
송두환 특검팀은 70일간의 수사를 통해 정상회담 준비 과정과 현대의 5억 달러 대북송금의 진상을 상당 부분 밝혀내는 등 큰 성과를 올렸다. 송두환 특검팀은 5억 달러의 대북 송금은 청와대 · 국정원 · 현대의 합작품으로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임동원 국가정보원장, 이기호(李起浩) 전 청와대 경제수석, 이근영(李瑾榮) 전 산업은행 총재 등이 현대상선에 대한 산업은행의 4천억 원 불법 대출 및 대북송금 편의 제공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정부가 북한에 정상회담 대가로 1억 달러를 주기로 약정했으며 이 돈을 현대가 대신 주도록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히 송두환 특검팀은 1억 달러가 ‘정책지원금’이라는 판단을 내리면서도 당시 정부가 공개적인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했다.
그러나 특검팀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북송금에 얼마나, 어떻게 관여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내지 못했으며, 수사 막바지에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현대로부터 150억 원을 수수했다는 의혹 시 불거져 나왔으나 수시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수사가 진행되지 못해 ‘미완의 수사’가 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