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더니 노 대통령이 13일 재신임 국민투표 실시 입장을 밝힌 직후 각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 ‘재신임’이 ‘불신임’보다 더 높게 나오자 각 당의 태도는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즉각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던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재신임을 묻겠다고 한 이유가 당초 ‘측근 비리 및 국민 불신’에서 ‘정치개혁’으로 변질되었다”며 “특별검사의 수사를 통해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진 후에 재신임을 물어야 한다”는 유보적 입장으로 돌아섰고 민주당은 “재신임 국민투표는 법률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정략이 게재된 쿠데타적 발상이므로 즉각 철회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노 대통령의 기자회견 직후만 해도 ‘재신임 반대’ 입장을 밝혔던 열린우리당 또한 여론조사 결과 재신임 지지율이 불신임보다 높게 나타나자 ‘국민투표 전폭지지’ 입장으로 돌변했다. 참으로 한심한 당리당략적 접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여론조사 결과 노 대통령 자신에 대한 지지도는 높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에 대해서는 오히려 재신임 지지율이 불신임보다 높게 나온 이유는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의 악화와 국정 혼란을 염려하는 국민들이 안정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야당이 사실상 반대 입장을 보이자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17일 청와대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임원들과의 오찬간담회에서 20일부터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제11차 아시아 ·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뒤 정당 대표들을 만나 재신임 국민투표 문제를 정치적으로 타결하겠다고 밝히고는 19일 출국하였다.
그 후 APEC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노 대통령은 10월 25일~26일 양일간에 걸쳐 4당 대표들과 개별 회동을 가졌으나, 재신임 국민투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계속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정국 혼란만 가중시켰다.
나는 처음 노 대통령의 재신임 제안을 접하고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국가 원로로서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을 담보로 헌법 규정에도 없는 재신임 투표를 불쑥 들고 나와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국민에게 고통을 주고 국정을 혼란시키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대통령중심제에서 대통령직을 그만두는 방법은 자진사임과 탄핵 두 가지 방법밖에 없다.
우리 헌법 어디에도 대통령을 재신임하기 위해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다. 헌법 제72조는 “대통령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외교 · 국방 · 통일 기타 국가 안위에 관한 주요 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고 제한규정을 두고 있으며 이 제한규정을 두게 된 것은 과거 유신정권 때처럼 대통령이 국민투표 실시를 남발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 측근 한 사람의 비리 혐의가 대통령의 진퇴가 걸린 국민투표에 부쳐야 할 정도로 국가 안위에 관한 정책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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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측근 비리가 터지자 국민에게 재신임을 묻겠다고 발표하는 노무현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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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대선 때 공약한 ‘중간평가’를 위한 국민투표가 논란이 됐을 때도, 대한변협은 중요 정책이 아닌 정치적 성과를 평가하는 국민투표는 명백히 위헌이라고 반대의사를 밝혔으며 김대중 · 김영삼 씨 등 그 당시 야당 대표들도 같은 이유로 국민투표를 반대하였다.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최고 통치권자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헌법이 파괴되는 것으로, 처음부터 법치주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대통령이 오기와 고집을 부려 국민투표를 강행하고 난 후에 신임을 받든 불신임을 받든 헌법재판소에서 재신임 국민투표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내려지면 재신임 국민투표는 정당성을 상실하고 대통령은 헌법을 위반한 중대한 사태에 처하게 되어 더 큰 혼란과 불행이 초래될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한 피해나 고통은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신임 국민투표가 선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대통령도 사람인 이상 실수할 수도 있고 측근의 부정비리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낮아지고 측근의 부정비리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대통령은 재신임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인가.
그리하여 남은 임기를 국민투표만 하다가 보낼 것인가. 또 노 대통령 이후의 다음 대통령이 정치적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교착정국에 이를 때마다 감정적으로 재신임 투표를 제기한다면 나라는 어떻게 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정국의 일대 혼란과 경제파탄을 가져올 재신임 투표는 노무현 대통령 자신에게도, 그리고 각 정당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국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안겨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동안 노 대통령이 스스로 재신임 국민투표가 위헌임을 인정하고 이를 철회할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해 왔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입장은 계속 애매하기만 했다.
기다리다 못한 나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국가 원로로서 국정 혼란이 조속히 종식되고 헌정질서가 바로잡히기를 기대하면서 10월 28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통해 헌법재판소는 하루바삐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재신임 국민투표의 위헌 여부를 조속히 가려줄 것을 요청했다.
대통령은 오기와 감정으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 법치와 덕으로 국민을 통합하고 화합시켜야 한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편안하게 잘살도록 할 책무가 있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함부로 내던지는 자리가 아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끊임없이 고통 받고, 고민하고, 십자가를 메는 희생과 봉사의 자리인 것이다.
내가 40년의 정치 생활, 두 번의 국회의장을 하면서 터득한 교훈은 민주정치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측근의 비리가 드러나면 국민에게 사죄하고 용서를 구한 후 국정 쇄신과 인사 개편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