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에 대해 민심이 멀어지고 지지율이 낮아진 것은 노무현 대통령 자신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지 결코 국민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자신이 생각을 바꾸고 통치 스타일을 새롭게 고쳐야 한다. 편협한 사고를 버리고 상대를 존중하며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리적인 정책을 도출해야 한다. 무엇보다 말수를 줄이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노 대통령은 정치개혁을 말 하기 앞서 측근의 비리부터 척결하고 권력형 부정부패를 뿌리 뽑는 데 앞장서야 한다. 그런 연후에 정치권의 합의를 토대로 제도 개선을 통해 정치개혁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이 나라는 노무현 대통령 개인의 나라가 아니라 국민의 나라요, 우리 자손들이 길이길이 살아가야 할 나라인 것이다. 하루하루를 고달프게 살아가고 있는 국민들은 국정 안정과 민생 안정을 바라고 있다.
여야 정당도 당보다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재신임 국민투표를 당리당략에 이용하거나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하여 오락가락해서는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참다못해 나는 10월 28일 재신임 국민투표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이날 구구회 중앙기자실에서 가진 기자회견 전문은 다음과 같다.
“지금 이 나라는 폭풍 전야와도 같다. 국민들은 불안과 고통 속에 허덕이고 있다. 청와대와 정치권은 모두 감정보다 이성으로 돌아가 냉정하게 그리고 지혜롭게 어려운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 한다. 나는 국가 원로로서 오늘은 재신임 국민투표 문제를 매듭짓기 위해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25, 26일에 있었던 4당 대표들과의 회동에서 재신임 국민투표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음으로써 혼란만 거듭되고 있다. 노 대통령은 계속 애매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국정만 어지럽게 할 것이 아니라 재신임 국민투표는 위헌이므로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대통령중심제에서 대통령직을 그만두는 방법은 자진사임과 탄핵 두 가지 방법밖에 없으므로,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 국민투표는 국민의 행복추구권, 재산권, 선거권 등 기본권을 침해하는 공권력 남용으로 위헌이 아닐 수 없다. 노 대통령이 국정을 담보로 재신임 국민투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최고통치권자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헌법이 파괴되는 것으로, 처음부터 법치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법에 의해 판단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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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2년 2월 20일 부시 미국 대통령과 / 청와대 리셥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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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노 대통령 자신이 스스로 재신임 국민투표가 위헌임을 인정하고 이를 철회할 것을 기다리던 나는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국가 원로로서 국정 혼란이 조속히 종식되고 헌정질서가 바로 잡히기를 기대하면서 오늘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하였다. 따라서 헌법재판소는 하루바삐 국가적 혼란을 방지하고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재신임 국민투표에 대한 위헌 여부를 조속히 가려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재신임 국민투표는 앞으로 노 대통령이 최도술 사건과 같은 비리사건으로 또다시 재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거나, 또한 다음 대통령이 정치적 입지가 불리할 때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신임을 묻는 선례가 되기 때문에 차제에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이를 위헌 여부가 반드시 가려져야 할 것이다.
정국의 일대 혼란과 경제 파탄을 가져올 재신임 투표는 무엇보다 국민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줄 것이며 노무현 대통령 자신이게도, 그리고 각 정당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대통령은 이를 즉각 철회하여야 하며 최악의 경우 위헌 여부가 가려질 때까지 그 실시를 유보하고 국민을 위해 국정에 전념해야 할 것이다.
또한 각 정당도 재신임 국민투표를 당리당략에 이용하거나 여론조사에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헌법과 법의 정신을 지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내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한 달 후인 11월 27일 헌법재판소는 소극적인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주심 권성權誠)는 당시 “노 대통령의 발언은 재신임 방법과 시기에 대한 구상을 밝힌 것으로 정치적 준비행위 내지 계획의 표명에 불과하므로 헌법소원의 대상인 공권력 행사로 볼 수 없다”며 재판관 5대 4의 의견으로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이때 각하 의견을 낸 재판관은 윤영철(尹永哲) · 하경철(河炅喆) · 김효종(金曉鍾) · 주선회(周善會) · 전효숙(全孝淑) 재판관이며 김영일(金榮一), 김경일(金京一), 권성(權誠), 송인준(宋寅準) 재판관은 위헌 의견을 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5명의 헌법재판관이 “국민투표를 실시하자는 대통령의 발언은 공권력 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각하 의견을 낸 것은 지엽적인 절차에만 집착해 국가 백년대계를 외면한 것으로 국정 혼란만 가중시킨 무책임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헌재는 잘못된 선례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라도 재신임 국민투표가 위헌인지 또는 합헌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결론을 내렸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헌재의 결정은 비록 각하 결정이었지만 9명의 헌재 재판관 중 4명이 위헌 의견을 냈고 각하 의견을 낸 5명의 재판관도 합헌을 주장한 것은 아니므로 대통령 재신임 국민투표는 사실상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9명 중 과반인 5명이 각하 의견을 냈지만 그것은 재신임 국민투표가 공고되지 않아 아직 법적 절차가 개시되지 않았기 때문에 판단을 유보했을 뿐 노 대통령이 정치적 승부수로 내놓은 재신임 국민투표가 헌법에 합치된다고 판단한 재판관은 1명도 없었다.
또한 헌재가 각하 결정을 내리면서 이를 “합헌으로 오해하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다시 말해 노 대통령의 재신임 국민투표 발언은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밝힌 것에 불과해 헌법소원이 다루는 ‘공권력 행사’가 아니므로 헌재가 판단을 내릴 필ㄹ요가 없다는 것이지 대통령이 정식으로 국민투표 공고를 할 경우 위헌 결정이 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말해주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특히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이 “국민투표가 역사적으로 직권자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이용된 사례가 허다했다”면서 “우리 헌법은 국민투표가 민주주의 발전에 해악을 끼친 신임투표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고까지 밝힌 대목을 노 대통령은 정확하게 읽었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