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소...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한 후 잦은 말실수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2003년 5월 21일, 5·18 행사 추진위 간부들과의 면담에서)”, “(최도술 씨 사건에 대해) 눈앞이 캄캄했다. 국민들에게 재신임을 묻겠다(2003년 12월 14일, 4당 대표와의 청와대 회동에서)”는 발언 등은 정쟁의 불씨가 되고 국민을 불안하게 했다.

그리고 4·15 총선이 다가오자 대통령은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청와대와 내각의 고위 공직자들을 총동원하여 선거에 출마시키고, 기자회견 등을 통해 수시로 열린우리당을 지원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는 분명히 사전 선거운동이었다.

대통령은 2003년 12월 24일,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사표를 낸 청와대 비서관들을 격려하는 모임에서 “총선에서 민주당을 찍는 것은 한나라당을 도와주는 것으로 인식될 것”이라며 열린우리당을 지원했고, 2004년 2월 18일에는 경인지역 언론사와의 합동 기자회견에서 “개헌 저지선이 무너지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나도 정말 알 수 없다”고 국민을 협박하는 듯한 발언까지 했다.

또한 대통령은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 초청회견에서 “국회에 우호적인 지지 세력이 있어야”, “압도적지지 기대”, “(열린우리당이) 표를 얻을 수만 있다면 합법적인 모든 것을 다하고 싶다”는 말들로 노골적인 사전 선거운동을 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계속되는 사전 선거운동에 대해 한나라당, 민주당 등 야당은 “노 대통령이 불법 관권선거를 계속한다면 대통령 탄핵을 추진하겠다”고 경고했고, 2월 28일 민주당은 노무현 대통령의 불법 선거운동에 대한 선거법 위반 여부 조사를 요구하는 의뢰서를 중앙선관위에 제출했다.

이에 대해 중앙선관위(위원장 류지담ㆍ柳志潭)는 3월 3일, 7시간의 격론 끝에 노 대통령이 2월 24일 방송기자클럽 회견에서 발언한 내용들이 선거와 관련한 공무원의 자세를 규정한 선거법 9조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대통령은 정치적 활동이 허용된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선거에서 중립의 의무를 지닌 공무원으로서 앞으로 선거에서 중립 의무를 지켜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기로 했다”며 이날 곧바로 노 대통령에게 공문을 발송했다.

이러한 중앙선관위의 결정은 노 대통령 탄핵까지 언급해 온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힘을 실어주었다.

다음 날인 3월 4일, 중앙선관위의 ‘헌정 사상 초유의 대통령 선거법 위반이라는 결정’에 대해 청와대는 “대통령은 정치인으로서 정치적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 관권선거 시대에 만들어진 선거법은 정비돼야 한다. 시대 상황에 맞게 선거법의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며 “존중하지만 납득할 수 없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야당의 탄핵 주장 등에 대해서는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정면 돌파 방침을 분명히 했다.

▲ 고현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이 중앙선관위 회의실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 여부를 결정하는 선관위 전체회의를 시작하며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자 중앙선관위의 이기선(李基善) 홍보 관리관은 “대통령이 비중립적인 발언을 하면 공무원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기 때문에 법 위반 결정을 내린 것”이라며 “선관위의 결정을 존중한다면 이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즉각 반박했다. 김호열(金弧烈) 선거관리실장은 “만약 대통령이 또 다시 법 위반 논란을 일으키는 언행을 할 경우 사안에 따라 다시 판단, 한 단계 높은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때늦은 폭설이 내리던 이날 밤, 민주당은 국회에서 긴급의원총회를 열어 노 대통령이 선거법 위반과 본인 및 측근 비리에 대해 사과하고 중립적 선거 관리를 공개적으로 약속하지 않을 경우 탄핵소추안을 발의키로 결의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3월 8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 보좌관회의에서 “탄핵 사유에 대해서는 굴복할 수 없다. 원칙적으로 대응해 나가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지지의사 표명이 위법이라 해도 아주 경미한 것”이라며 “이를 이유로 대통령직을 중단하라는 것은 지나친 처사”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은 노 대통령의 이 같은 태도가 “선거법 위반에 대해 사과하면 탄핵안을 발의하지 않겠다”는 민주당의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민주당은 3월 9일 아침, 국회 대표실에서 상임중앙위원 및 상임고문 연석회의를 열어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발의하기로 최종 결론을 내렸다. 나도 이날 회의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사례를 적시하면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를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탄핵안이 발의되더라도 내심 노 대통령이 사과함으로써 스스로 문제를 수습할 것을 기대했다. 그리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평소 노무현 대통령이 너무 말이 많아 결국 말 때문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해 왔다. ‘불법 대선자금이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그만두겠다’는 발언도 야당이 부탁해서 한 것인가? 대통령 스스로 한 말이 아닌가? 이제 10분의 1을 넘었으니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도덕적 믿음을 줄 수 있겠는가? 결국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노 대통령은 말을 좀 아꼈으면 좋겠다. 두 마디 할 것을 한 마디로 줄여 달라.

탄핵에 대해서도 청와대와 열린당은 야당이 4·15 총선거를 겨냥해 정치 공세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하나 탄핵정국은 결국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다. 어떻게 대통령이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이 당선되니 민주당을 찍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있느냐?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된 것 아닌가? 민주당 분당의 책임을 대통령도 느껴야 한다.

대통령의 불법선거 발언 중 가장 심각한 것은 개헌 저지선 확보 발언이다. ‘총선에서 열린당이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 뒤에 어떤 일이 생길지 나도 정말 알 수가 없다’ 고 한 말은 국민에 대한 협박이다. 왜 이러한 중요한 발언을 적당히 넘어가려 하느냐?

일부에서는 야당의 탄핵소추 요건이 약하다고 한다. 그러나 선관위의 결정에 불복하는 태도야말로 가장 큰 탄핵요건이다. 대통령이 법이 자기 맘에 들면 승복하고 맘에 안 들면 불복하는데, 이 나라 국민 누가 법을 지키겠는가? 열린당의 간부들은 대통령에게 이런 점을 지적하고 대통령 이 국민에게 사과하고 재발을 방지하겠다고 약속하도록 건의해야 한다.

나는 4·15 총선이 후유증 없이 원만히 치러지고 17대 국회가 정상적으로 개원되기를 누구보다 원하는 사람이다.

노 대통령에게 마지막으로 충고한다. 그리고 진심으로 부탁한다. 노 대통령은 헌법기관인 선관위의 결정을 말이 아닌 행동으로 존중하라. 그리고 앞으로 언행을 조심하며 특히 선거 관련 발언은 신중하게 하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탄핵 문제를 스스로 수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날 오후,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소속의원 159명의 서명을 받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전격적으로 국회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이 소추안은 본회의에 보고되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 발의된 것은 헌정 사상 최초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