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동생을 잃은 일이다. 지금까지도 어머니와 내게 한을 심어준 사건이었다. 본래 나에게는 천섭(千燮)이란 이름의 세 살 아래 동생이 있었다. 학교도 같았으니, 난 4학년 때부터 동생과 함께 통학한 셈이다. 그러나 내가 5학년 때, 그러니까 녀석이 2학년 때였다. 교실에서 녀석이 좀 떠들었던 모양인데, 젊은 일본인 선생이 무자비하게 몇 번 업어치기로 마루바닥에 때려눕혔다는 것이다. 그게 치명적이었다. 어린 동생은 그만 머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 실려가야 했던 것이다. 결국 뇌를 다텨 시름시름 앓다가 대구 동산병원(현 계명대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어린 동생에게 잔인한 짓을 한 일본인 선생을 증오하고 한을 품었지만 겨우 초등학교 5학년생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의 비애’로 치부하게에는 내게 너무 큰 충격이었고, 당시 땅을 치고 오열하던 어머니의 모습은 지금도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래서 내 형제는 2남1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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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년 대구 수창초등학교 졸업 / 맨 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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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내가 민족을 생각하며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도 힘없는 나라의 슬픔을 어린 나이에 체험했기 때문이리라. 당시 일제가 이 나라의 꽃다운 정신대로, 또는 군대로 끌고 가 무참히 짓밟은 것이나 어린 새싹을 때려 죽게 한 것 모두가 우리나라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일제의 잔인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일본인에게 동생을 잃은 내가 후에 민족학교인 <대륜중학교>를 선택한 건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당시 공립은 <경북중학교>가 있었고, 사립은 기독교 계통인 <계성중학교>와 천주교 계통인 대륜중학교가 있었다. 물론 당시 내게 종교는 없었다. 그러나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나를 좀더 민족의 냄새가 풍기는 학교로 보내고 싶어했기에 대륜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알다시피 대륜중학교는 3‧1운동 직후 대구 지역의 독립운동가인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등이 설립한 학교였다. 당시 이 분들은 민족운동가이자 저항시인인 이상화 선생의 서재인 <담교장>에 모여 학교 설립을 의논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그 후 그 분의 시비가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져 내가 시간이 있을 때마다, 특히 정치적으로 심정이 복잡할 때면 그 시비를 찾기도 했지만 상화 선생과 대구, 그리고 상화 선생과 대륜중학교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 할 수 있다.
특히 상화 선생은 대륜중학교와는 큰 인연이 있었던 분이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널리 알려진 대표적 항일 민족시인인 상화 선생은 1901년 대구에서 출생, 1937년부터 대륜중학교의 전신인 <교남(嶠南)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는데 그때 선생과 관련한 많은 일화들이 남아 있다. 41세에 위암으로 돌아가시기까지 대구에서는 저항시인으로서의 이름 못지 않게 항일운동가, 민족교육자로 더 큰 존경을 받았다. 상화 선생은 3‧1운동 때는 대구학생 봉기를 주도하다가 발각돼 고초를 겪었고 의혈단 사건에 연루, 구금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는 교육과 인재양성이 급선무임을 일찍이 전파하였다.
상화 선생은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민족학교이자 가난한 사학이었던 학교의 사정을 감안, 3년 간의 교편생활 동안 완전 무보수로 한 푼의 월급도 받지 않았다. ‘춘향전’을 번역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우리 민족이 약소국에서 벗어나 일본에 이기려면 정신 못지않게 힘도 길러야 한다며 우리나라 중학교로서는 처음으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때 상화 선생은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