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서 박정희 의장, 김종필 부...

박 의장의 방일을 정리하는 기본적인 질문 사항이었고, 또 외국기자들이 궁금해 하는 것을 박 의장이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도록 미리 내용을 잘 생각해서 던진 질문이었으나 박 의장은 나의 그러한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했던지 퉁명스럽게 짤막한 답변만 했다.

“대일 청구권 문제에 대해서는 실무자 회의에서 진전이 없어 정상회담에서는 제시하지 않는 것이 서로 좋다고 생각해서 구체적인 토의가 없었습니다.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셋째 질문에 대해서도 현 단계에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난 그 후 조선일보사가 연재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전기인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의 내용을 보고 그날의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 박 의장은 나라를 걱정하는 내 마음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그날 저녁, 정일영(鄭一永) 당시 한·일회담 대표에게 자신에게 맨 처음 질문한 기자가 누구냐고 묻더니 “《동아일보》 그 친구, 국내에서도 애를 먹이더니 여기 와서도 속을 썩이는구먼.” 하며 불평을 하더란 것이었다.

그때는 나와 개인적으로는 잘 알지 못하던 때였지만 박정희 의장의 대(對) 언론관, 특히 기자들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다. 박 의장이 그때까지 왜 이처럼 언론에 대해 부정정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이 책에 다시 나오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나의 주일특파원 생활은 3개월로 끝나고 말았다. 12월 초 김성열 부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안에 기자실이 생겨 출입할 사람이 마땅찮으니 즉시 귀국하라는 게 아닌가.

사실 나는 2~3년 고생하더라도 특파원 생활을 더 하고 싶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쪽은 쳐다보기도 싫으니 다른 사람을 보내주시오”라고 완곡하게 거부 의사를 밝혔으나 반드시 ‘병역을 필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최고회의 내부 규정 때문에 신문사 사정이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귀국한 나는 최고회의에 출입하게 됐다.

▲ 일본 특파원 시절 / 왼쪽 나, 오른쪽은 한국일보 임삼 특파원, 오른쪽에서 두번째는 이한기 한일회담 자문위원 (훗날 국무총리 서리)

최고회의에 기자실이 생기기 전에는 건물 밖의 수위실에 홍보물을 갖다 놓으면 신문사에서 급사가 수거해 가는 식이었다. 그 후 최고회의에는 처음엔 한 신문사에서 한 사람씩 출입하게 하다가 나중엔 2명으로 늘어나 나는 신문사뿐 아니라 고등학교도 후배인 유혁인(柳赫仁 기자ㆍ후일 청와대 정무수석)와 함께 출입하게 됐다.

최고회의에 출입하던 어느 날 그동안 얼굴을 나타내지 않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작업복 차림으로 불쑥 기자실에 나타났다. 이것이 나와 김종필 씨와의 첫 대면이었다. 김종필 부장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 간담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강력한 항의를 했다.

“김 부장이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지에 쓴 글을 보니 5·16 전에 나라와 군이 부패되었는데 그 중요 원인 중의 하나가 신문기자 때문이라 했더군요. 즉 군에서 휘발유 한 드럼을 빼내어 팔면 신문기자가 이 사실을 알고 이를 무마하기 위하여 결과적으로 두 드럼, 세 드럼까지 빼내게 되어 더 부패하게 된다는 글을 보았는데 김 부장, 그럴 수가 있습니까? 물론 사이비 기자들이 군의 부정을 알고 그걸 미끼로 돈을 뜯어가는 경우도 없진 않았겠지만 그것으로 기자 전체를 평가하고 더구나 외국 잡지에 그런 걸 쓸 수가 있단 말입니까? 기자들 가운데는 당신들 못지않게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고 애국하는 기자들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당신들은 권총으로 나라를 사랑했지만 우리 언론인들은 붓으로 나라를 사랑해 왔습니다. 다만 나라 사랑하는 방법이 권총과 붓이라는 차이뿐인데 그렇게 사이비 기자를 언론인 전체로 생각하고 매도할 수 있습니까?”

내가 이렇게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에게 강력히 항의하자 옆에 있던 동료 기자들이 내가 형무소에 다시 끌려가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던지 옆구리를 찌르며 자꾸 말을 가로막으려 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고 “나는 혁명정부 밑에서 억울하게 육군형무소를 갔다 온 적도 있는데 현 정부가 이렇게 언론을 탄압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며 항의를 했다. 시종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종필 부장은 화내지 않고 웃으며 “이 기자의 말씀에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잘못된 점이 있다면 내 사과하지요”라고 뜻밖에 부드러우면서도 솔직한 대답을 했다.

이때 나는 당시 막강한 힘을 가진 김종필 부장이 구차스럽지 않고 솔직한 데가 있어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 후 박정희 의장도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이만섭 기자, 그 사람 줏대 있어. 날카로운 친구야”라는 평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