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자 정국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그간 혁명정부의 의중을 읽던 윤보선 대통령은 3월 23일 결국 대통령직에서 하야했고, 박정희 의장이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다.
윤 대통령의 하야에 대해서는 당시 정계에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었다. 즉 윤 대통령은 혁명군이 정권을 잡게 되면, 바로 자신에게 정권을 넘겨줄 것으로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 혁명군이 “5·16은 인조반정(仁祖反正)과 같습니다. 윤 대통령을 끝까지 모시겠습니다.”라고 한 말을 믿었고, 그 때문에 5·16을 사전에 알았으면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세간의 소문도 있었다. 난 《동아일보》 시절 윤 대통령이 하야한 뒤 어느 날, 이 문제에 대해 윤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유원식(柳原植 장군ㆍ최고회의 재정위원장)이 사전에 거사(擧事) 사실을 알렸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무슨 말이오? 유 장군이 정원 초하룻날 세배하러 와서 얼핏 지나가는 말로 비슷한 소리를 한 적은 있지만, 정식으로 들은 적은 없소. 당시에는 4월 혁명이니 5월 혁명이니 하는 군사혁명 설(設)이 공공연하게 나돌지 않았소?”
아무튼 윤 대통령은 나중에 자신에게 돌아올 것으로 생각한 정권을 군부가 계속 장악하자 그들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되어 그만두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당시 정치인들은 윤 대통령이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보다는 하야하기 전 구(舊) 정치인들의 차기 선거 출마를 제한하는 ‘정치활동 정화법’에 서명한 사실에 더욱 커다란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물러나려면 그냥 물러나야지, 왜 다른 사람들의 손발까지 묶어놓고 물러나느냐는 것이었다.
1962년 가을의 어느 날, 나는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과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운명의 날을 맞게 된다. 박정희 의장과 단독회견을 한 건 5·16 후 내·외신 기자를 통틀어 그날 내가 처음이었다.
하루는 김성열 정치부장이 나를 불렀다.
“국방부에 출입하는 윤양중(尹亮重기자ㆍ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위원장)에 의하면 며칠 뒤 강원도(江原道) 화진포(花津浦)에서 실시하는 해병대 상륙작전에 박 의장이 참석한다고 들었소. 그러니 이번에 꼭 단독회견을 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나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기자라면 누구도 감희 접근할 수 없었던 박 의장을 내가 어떻게 만난단 말인가. 그러나 김성열 부장은 막무가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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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송도 해변가에서 박정희 의장이 최고회의 출입기자들과 호나담하고 있다 / 뒷줄 왼쪽부터 김현옥 전 서울시장, 나, 김영일 합동통신, 곽지용 동화통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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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해도 좋으니 한번 시도해 보시오.”
“그러면 단독 회견을 못해도 날 원망하시는 마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국방부 출입기자단과 함께 여의도 공군 비행장을 떠나 화진포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훈련이 끝나면 박 의장이 군함을 타고 울릉도를 시찰할 예정임을 알아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우선 이후락 공보실장에게 미리 얘기를 해두었다.
“군함에 들어가 박 의장과 단독회견을 하려 하니 좀 도와주시오.”
그러나 입장이 곤란해진 이 실장은 확답을 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딱 부러지게 거절하지도 않았다. 친해 놓아야 하는 최고회의 출입기자중 최고참인 내 부탁이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훈련이 끝나자 국방부 출입 기자들은 그들이 타고 온 국방부 전용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갔지만 나는 그때를 기다려 몰래 박정희 의장이 승선할 예정인 군함으로 향했다. 역시 경호 요원들의 제지가 있었지만 나는 재치 있게 둘러댔다.
“이후락 공보실장에게 미리 허락을 받았는데…….”
“글세, 그런 연락을 받은 적이 없는데요.”
경호원들이 주저주저했지만, 내 얼굴을 잘 아는 신동관(申東寬경호과장ㆍ후일 국회의원)이 나를 믿고 배를 타게 해줬다. 나는 배 밑의 선실에 숨어 있다가 해군 의장대의 나팔 소리와 함께 배가 움직이자마자 선장실로 올라갔다. 마침 박 의장이 맞은편에서 선장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박 의장의 뒤로는 이맹기(李孟基) 해군 참모총장, 함명수(咸明洙) 함대 사령관, 민기식(閔機植) 육군 1군사령관, 이후락 공보실장이 따라 들어왔다.
“《동아일보》이만섭 기자입니다.
내 소개를 했다. 그러자 이 실장이 일부러 놀라는 표정으로 “이만섭 기자, 여기 웬일이오” 하면서 박 의장에게 나를 소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