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의장의 민정불참 선언 (29회)

다시 엄청난 파도가 밀어닥쳤고 박 의장이 순간 비틀거리며 하마터면 요동치는 바다 한가운데로 떨어질 뻔했던 위기일발의 사태가 발생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진땀이 날 정도로 험하고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날 수행했던 주위의 내로라하던 장군들도 어쩔 줄을 몰라 허둥댔고, 학창 시절 운동으로 단련되었던 나도 혼이 나갈 정도로 40여 년 전 그날의 울릉도 파도는 지금도 엄청난 위력으로 내 가슴에 남아있다. 그리고 만일 그 때 그 자리에서 박 의장의 신변에 어떤 일이 발생했더라면 이 나라의 운명도 그날의 파도만큼이나 엄청나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이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국가원수로서 울릉도를 시찰한 것은 우리 역사상 박 의장이 처음이었고 지금까지도 없는 일이다. 어쨌든 우리 일행은 이처럼 구사일생으로 군함에 옮겨 타고 힘겹게 파도를 헤치며 포항으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도와의 격전을 겪었던 터라 군함 안에서는 모두가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그곳에서도 나의 임무(?)인 단독 인터뷰의 기회는 가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다리던 박 의장과의 인터뷰는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박 의장에 대한 나의 새로운 감정이 싹트는 가운데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특별 기동열차 안에서야 마침내 이루어질 수가 있었다. 기차 안에서의 단독 인터뷰를 통해 나는 앞으로의 정치 일정과 선거 예정일 등 참으로 많은 기사를 얻어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것은 하나하나가 알토란 같은 특종들이었던 것이다. 난 원고 마감시간 때문에 대구역에서 먼저 내려 북성로(北城路)에 있던 《동아일보》지사까지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가 전화로 기사를 불렀다.


	▲ 1962년 10월 포항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이루어진 박 의장과의 단독 인터뷰 기사

그날 《동아일보》석간 1면은 ‘박 의장과 단독회견’ 내용의 기사로 가득 메워졌다. 나는 그때 그 덕에 특종 시가로 적지 않은 상금을 탔으며, 그 상금으로 정치부 저녁 회식을 걸판지게 벌였다. 그 박 의장과의 회견 이후 박 의장은 나를 가끔 불러 비공식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박 의장을 만날 때마다 나는 박 의장이 확고한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 나라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을 기어이 이룩해야겠다는 굳은 신념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이에 공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1962년 10월 23일 세계적으로 초미의 관심사였던 쿠바사태가 발발하자 나는 이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특파원으로 워싱턴에 급파되기도 했다. 상주 특파원이 없을 때라 쿠바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머무르며 특파원 활동을 했다. 그런데 당시 외신을 인용치 않고 직접 특파원의 생생한 보도를 실은 것은 《동아일보》뿐이었고, 나도 코피를 쏟아가며 역사의 현장을 뛰어다녔다.

그때 나는 세계대전의 위험을 무릅쓰고 쿠바로 가는 소련 미사일선단을 과감히 봉쇄한 케네디 대통령의 용기와 결단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지금도 나는 케네디 대통령을 미국의 대통령 중 누구보다도 결단력과 용기를 갖춘 정치 지도자로 존경하고 있다.

그런데 쿠바사태가 해결되고 귀국한 뒤 1963년이 밝자 국내 정국은 하루하루 어수선해졌다. 2월 25일 박 의장의 처조카이며 5·16혁명 동지이지 정권의 제2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4대 의혹사건(증권 조작, 워커힐호텔 건설, 새나라자동차, 파친코 도입 의혹)으로 최고위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마침내 ‘자의 반 타의 반’ 외유를 떠났고 그 다음날 민정이양에 대비하여 여당의 역할을 맡게 될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었다.

그리고 또 바로 그 다음 날인 2월 27일, 서울 시민회관에서 박정희 의장이 민정 불참을 선언하는 이른바 ‘2·27 선서식’을 거행했으며, 3월 6일에는 김재춘(金在春) 신임 중앙정보부장이 4대 의혹사건에 김종필 씨가 개입되었다는 중간발표를 하는 등 정국은 하루가 다르게 어지러이 급류를 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즈음인 3월 5일 박 의장이 강원도 지역을 시찰하기 위해 춘천(春川)을 방문했다. 그런데 바로 이 시찰이 박 의장이 ‘민정 불참’을 번복, 다시 정치를 하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박 의장의 시찰을 취재하기 위해 우리 최고회의 출입기자들은 미리 춘천에 도착해 춘천 미군 비행장에서 박 의장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역시 박 의장을 맞으러 나온 민기식 1군사령관과 비행장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요즘 일선의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민 사령관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중요한 발언들이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