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안정돼야 군도 안정이 되고 안보에도 허점이 생기지 않을 텐데 정치가 시끄러우니 군도 안정이 되질 않고 안보도 극히 우려스럽습니다. 박 의장이 민정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박 의장의 민정 참여를 강력히 시사 하는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일단 정부에 나갔던 군인들은 그대로 민정에 참여하는 게 낫지 그들이 군에 복귀한다면 오히려 군의 지휘체계에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 아닙니까.”
이러한 가운데 박 의장이 탄 비행기가 도착했고 우리의 대화는 끊어졌지만 그의 발언은 중대한 발언임에 틀림없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박의장 일행의 행차는 눈에 띄게 초라했다. 민정 불참을 선언한 이후인지라 수행원도 이후락 공보실장, 장경순(張坰淳) 최고위원뿐이었고, 공항 출영객도 얼마 되지 않아 한눈에도 권력 이동에 따른 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튼 박 의장 일행이 숙소인 춘천관광호텔을 향해 떠나자 나는 숙소인 여관으로 돌아와 급히 서울 본사로 기사를 타전했다. 내가 전화로 보낸 기사의 요지는 ‘민기식 사령관 등 일선 장성들 박 의장의 민정 참여 희망’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그날 《동아일보》는 나의 기사를 1면에 크게 보도했고, 이 때문에 나에게는 또 한 번의 ‘필화사건’을 겪게 될 뻔 한 위기가 닥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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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기식 사령관의 민정참여를 시사하는 발언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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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에 내가 쓴 기사가 나가자 서울에 있던 김종오(金鍾五) 육군 참모총장이 급히 춘천에 있는 민기식 사령관을 찾는 등 큰 소동이 벌어졌다. 김종오 장군은 당시 박병권(朴炳權) 국방장관과 함께 박의장 휘하의 혁명세력이 민정에 불참하고 군에 복귀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때 김종오 참모총장의 전화를 받은 민기식 사령관은 자신의 발언이 실린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가 그렇게 썼을 뿐“이라고 나에게 미뤘던 모양이었다.
그러자 김 총장은 이런 민 사령관의 해명에 물러서지 않은 채 “이만섭 기자를 구속해 진부(眞否)를 가리자”며 급기야 나를 연행하려 했고, 곧바로 내가 묵고 있던 여관으로 헌병들이 들이닥쳤던 것이다.
“《동아일보》 이만섭 기자 어디 있소! 우리와 함께 가야겠소.”
나는 헐레벌떡 달려온 헌병들을 보자 기가 막혔다. 내가 체포되려는 일촉즉발의 순간이 눈앞에서 벌어졌고, 여관에 함께 묵고 있던 주변의 기자들과 헌병들 간의 승강이가 계속되었다. 바로 그때 함께 있던 당시 합동통신의 김영일 기자와 《부산일보》의 김종신(金鍾信) 기자(후일 부산 MBC 사장)가 급히 춘천관광호텔의 이후락 공보실장에게 이 사실을 전화로 알렸던 모양이었다.
조금 있자 당시 중앙정보부 강원도 지부의 엄 모 지부장이 헐레벌떡 여관으로 뛰어왔다. 이후락 실장이 급히 박 의장에게 보고해 엄 지부장을 보낸 것이었다. 이렇게 달려온 엄 지부장이 헌병들을 철수시킴으로써 나는 ‘제2의 필화사건’이 될 뻔했던 위기상황을 가까스로 모면하게 되었다. 이런 소동이 있은 후 다음날 아침, 박 의장 일행은 다음 시찰지인 원주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호텔 2층에서 걸어 내려오던 박 의장이 나를 보더니 묘한 웃음기를 띤채 “이만섭 기자, 아직 안 잡혀갔구먼” 하며 농을 던졌다. 나 역시 애써 웃음을 띠고 있던 박 의장의 얼굴에서 어딘가 긴장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날 아침 박 의장의 얼굴에 비쳤던 그 묘한 긴장감은 바로 이 나라의 역사를 바꿀 또 한 번의 결심을 예고하는 것이었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민정 불참’을 철회하고 ‘민정 참여’를 마음먹은 순간이었던 것이다. 원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박 의장은 수행했던 민기식 사령관이 듣는 데서 “……죽일 놈들”이라고 알 듯 모를 듯 혼잣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 장군이 “내일 사령부에 중령급 이상 장교들을 모으겠습니다. 한 말씀 하시죠”라고 권하자 “……그러면 훈련도 못하는데 그럴 것 없소”라며 애써 만류했다지만 박 의장은 굳은 얼굴로 더없이 착잡해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