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민정 참여’는 곧 혁명공약을 어기는 것으로 비쳐져 혁명 주체 세력들 간에도 서서히 균열이 생기고 있던 가운데 박 의장이 민정 불참을 선언하자 정국은 다시 불을 지핀 듯 시끄러워졌고, 또 일선을 시찰해보니 군이 동요하는 등 안보에도 역력히 구멍이 나고 있음을 직접 확인한 참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내가 쓴 《동아일보》기사를 두고 김종오 장군이 나를 구속하려고 했던 사건 역시 박 의장의 분노를 폭발시키고, 또 그가 민정 참여를 재 결심 하는 데에 한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 같은 착잡한 심정을 안고 원주에 도착한 박 의장은, 연병장에 영관급 장교들이 모두 집합한 자리에서 다시 ‘민정 참여’를 시사 하는 이른바 충격적인 ‘원주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날 ‘원주 발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 나라는 몇몇 정신차리지 못한 정치인들을 위해 있는 나라가 아니며 하물며 그들이 장난을 치기 위한 장난판이 아닙니다. 정치인들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이행치 않아 정치적 위기가 도래한다면 이를 못 본 체하는 것이 애국적인 행동인가, 아니면 방관하지 않는 것이 애국적인 행동인가, 나는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날 3월 8일자 모든 신문은 ‘국민에게 해독을 끼치고 질서를 혼란케 한 기성 정치인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방임하는 것이 애국이냐, 또는 방관하지 않는 것이 애국이냐……’란 제목으로 1면 머리기사에 박 의장의 경고를 실었다. 정치에 혼란이 생기면 혁명정부는 방관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이 담긴 것이었다. 이러한 인력의 과정을 거쳐 박 의장은 3월 16일 ‘군정 4년 연장’을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그러나 이 ‘군정 4년 연장’ 선언은 국내외의 반대와 박 의장의 번복으로 무위로 돌아갔고, 우여곡절을 거듭한 끝에 박정희 의장과 ‘5·16 혁명 주체들’은 마침내 민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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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회의 출입기자 시절 / 왼쪽부터 나, 이후락 최고회의공보실장, 정재호 경향신문 기자, 이종호 국제신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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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8월 30일 강원도 지포리(芝浦里) 에서 “다시는 이 나리에 본인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유명한 고별사를 끝으로 군에서 예편한 박 의장은 군복을 벗은 후 곧바로 공화당에 입당함으로써 10월 15일의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8월 30일, 그날 박 의장이 군에서 예편하고 공화당에 입당하면서 정국은 본격적인 대선 정국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이미 야당인 민정당(民政黨ㆍ총재 김병로金炳魯)에서는 윤보선 전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고, 민주당(총재 박순천)은 허정 씨를 내정한 상태였다.
이때 나는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됐다. 신문기자 이전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나라와 국민을 위하는 길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하면 할수록 서민의 사정을 잘 모르는 귀족 출신인 윤 전 대통령보다는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농촌과 서민의 고통을 잘 아는 박정희 후보에게 마음이 쏠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자유당의 부정선거 현장을 목격한 데다 민주당 내의 극심한 신·구파 싸움의 현장을 직접 지켜본 바 있기에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집념이 강한 후보를 떠올렸던 것이다. 때문에 깊은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은 역시 박정희 후보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내가 어느 후보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도 기자로서는 문제였다. 기자는 어떤 상황이든 객관성과 균형 감각을 유지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이 이미 한쪽으로 치우쳤다면 이는 기자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이고, 또 그런 마음으로 신문사에 그대로 있는다면 그것은 언론에 대한 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당시 《동아일보》의 분위기가 객관성보다는 오히려 친(親) 윤보선―반(反) 박정희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는 것도 내가 신문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1963년 추석날 밤, 집 마당에 보름달을 바라보며 집사람과 의논한 끝에, 나는 결국 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정치인으로서 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결심했다. 그 날 따라 보름달은 유난히도 밝았다. 나는 다음 날 곧바로 장충단 의장 공관에서 박 의장을 만나 내 결심을 밝혔다.
“저는 박 의장님의 민족·자주의식과 가난에서 벗어나 자립경제를 이룩하겠다는 신념에 공감하여 공화당에 입당해 박 의장님을 돕기로 결심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내 말에 박 의장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