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후보에 대한 사상 의혹과...

부산 유세 장소는 공설운동장이었는데 부산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가 모였다고 했다.

예정대로 박정희 후보가 세 번째 연설을 마치자 많은 관중들이 일어서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나는 급히 뛰어서 단상에 올라갔다. 그런데 나는 얼마나 급했던지 “존경하는 부산 시민 여러분”이라고 해야 할 것을 “존경하는 마산 시민 여러분”이라고 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고 세 번씩이나 실수를 했다. 내가 세 번째로 “마산 시민 여러분”이라고 하자 청중들이 ‘와’하고 폭소를 터뜨렸다.

그제서야 ‘부산’을 ‘마산’으로 잘못 말한 줄 알아차린 나는 “부산 시민이든 마산 시민이든 내 말을 잘 들어주십시오. 내 연설을 듣지 않고 가면 무산 시민이든 마산 시민이든 나는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진짜 알맹이 있는 연설은 내 연설이니 내 연설을 안 듣고 가면 나중에 후회할 것이오”라고 소리를 지르자 청중석에서는 또 한 번의 폭소가 터져 나왔고 돌아가던 청중들도 발길을 돌렸다.

내 연설은 청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얼마나 분위기가 좋았는지 나는 연설 마지막에 “조국의 앞날을 위해 우리 다 함께 만세를 부릅시다”고 선창을 했으며, 수많은 청중들도 함께 열광적으로 우렁찬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만세를 부른 뒤 내려온 나는 수많은 청중들 틈에 끼여 후보 유세반 차량을 놓치고 걸어야 했다. 그대 부산공설운동장을 빠져나가던 청중들 속에서는 “오늘 연설은 이만섭 씨가 제일 잘했다” “이만섭 씨 참 연설 잘하더라”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기자용 버스를 타고 동래관광호텔에 돌아온 나는 한 여학생으로부터 난생 처음으로 사인 요청을 받고 흥분하기도 했다. 그녀는 사인을 받기 위해 일부러 거기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기도 했지만 그 순간 연설에 대한 자신감도 생겼다. 지금도 평생 처음으로 나에게 사인을 부탁한 그 여학생이 고맙기만 하다.

아무튼 부산 유세는 대성공이었다. 대구 유세에서 자신감을 얻은 우리 일행은 부산 유세를 마치고는 마침내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부산 유세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내 건의를 받아들여 “연좌제를 지양하여 앞으로는 관제 공산당을 만드는 과거의 폐습을 없애겠다”고 공약함으로써 커다란 호응을 받았다. 특히 진보세력과 젊은이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여순사건에 대해 박정희 후보의 관련 의혹을 제기한 동아일보의 윤보선 후보 기자회견 기사

당시 선거에서 가장 초점이 됐던 건 이른바 사상논쟁이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 의장의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박정희 후보는 여순(麗順)반란사건의 관련자입니다. 따라서 박정희 후보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국민들은 의혹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는 곳마다 박정희 후보야말로 민족의식이 강한 데다 자주국방과 자립경제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대안임을 역설했다.

사실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계보인 민주당 구파와 가까운 편이었던 동아일보는 박 의장이 여순반란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기사를 실은 호외를 수백만 장 뿌려 우리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미국도 은근히 박정희 후보를 탐탁찮게 생각해 선거는 결코 쉽지 않았다.

투표 이틀 전 우리는 마지막 유세인 춘천 유세를 마치고 귀경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이 생겼다.

나는 연설을 마치고 춘천의 분위기를 들어보느라 좀 늦게 서울로 돌아와 장충동 박 의장 공관으로 갔다. 그러나 응접실엔 여느 때와 달리 싸늘한 분위기 속에 긴장감마저 도는 게 아닌가.

박 의장을 중심으로 김성열 동아일보정치부장, 이후락 공부실장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니 그래 내가 빨갱이란 말이요!”

내가 들어서자 박 의장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김성열 부장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정말 동아일보가 그런 짓을 해도 되는 거요.”

박 의장은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내가 공산주의자라고 모함하는 그따위 삐라를 만들어 수백만 장이나 뿌리고 말이야.”

박 의장은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연유를 알아본즉, 투표 하루 전날 박 후보와 윤 후보의 인터뷰를 1면에 함께 싣기 위해 동아일보 김성열 부장이 공관으로 찾아온 것이었는데, 그동안 동아일보에 대해 울분이 쌓여 있던 박 의장이 김성열 부장을 보자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