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그때 내 나이는 서른하나, 불의와 부정을 보면 참지 못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혈기 왕성한 때였다. 이때부터 삼선개헌 전까지 박정희 대통령은 날 자주 불러 여러 문제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구하기도 했다.
후일 정치 스타일이 바뀌기는 했지만, 박 대통령은 사실 삼선개헌 전까지만 해도 직언하는 나를 무척이나 좋아해 사흘이 멀다 하고 나를 찾곤 했다. 특히 박 대통령은 저녁 무렵에 식사를 함께 하자고 나를 자주 부르셨다.
“이 의원, 오늘 저녁 약속 있어?”
“네, 약속이 있습니다만…….”
“그 약속 취소하고 나하고 저녁이나 같이하지?”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둘은 심심한데 누구 없을까?”
그래서 나는 박 대통령과 육사 동기이고 나의 중학교 은사였던 김재규 장군이 좋지 않으냐고 말씀드리면 “그거 좋지, 잘 됐구만”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부속실의 전석영 비서를 불러 즉각 연락하도록 했다.
이렇게 하여 박 대통령, 김재규 장군과 나는 청와대에서 자주 저녁식사를 함께 하곤 했는데, 세월이 흘러 유신체제 이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의 가슴에 총을 겨누었으니 이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가…….
대통령 선거 2개월 뒤인 1963년 12월 17일, 박정희 의장은 5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더불어 6대 국회가 개원됐으며, 신헌법이 발효되면서 체 3공화국이 드디어 닻을 올렸다. 이어 동아일보사장이던 최두선 씨를 국무총리로, 김유택(金裕澤) 씨를 부총리로 한 새로운 내각이 출범했다. 6대 국회에서는 국회의장에 이효상 의원, 부의장에 여당의 장경순 의원, 야당의 나용균(羅容均) 의원이 각각 선출됐다.
6대 국회에 처음 진출한 나는 여당의 원내부총무를 맡게 됐다. 당시 원내총무는 여당의 혁명주체인 육사 8기 김동환(金東煥) 의원이었고, 야당 에서는 김영삼 의원이었다. 또한 원내부총무는 여당에서는 나와 함께 김재순 의원(후일 국회의장)이, 그리고 야당에서는 유치송(柳致松ㆍ후일 민한당 총재), 김은하(金殷夏의원ㆍ후일 국회부의장)이 맡았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선 안 될 것은 박 대통령의 용인술(用人術)이다. 국무총리로 기용한 최두선 씨는 선거 당시 동아일보사장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여순사건 관련 사실을 호외로 발행할 정도로 반대쪽에 서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과감히 국무총리 자리에 앉혔다는 건 그만큼 대범하고 인재 등용의 폭이 넓었다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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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향신문의 제3공화국 초대내각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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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박 대통령의 폭넓은 인재등용에 대해 직접 체험한 일이 있다. 그 무렵 나는 장기영(張基榮) 부총리에게 조병옥 박사의 비서였던 조승만 씨를 증권거래소 감사 자리에 추천한 적이 있었는데, 조심성 많은 장기영 부총리는 그 일 같으면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박 대통령에게 그 일을 말씀드렸더니 박 대통령은 “조 박사 비서 같으면 도와주어야지……” 하면서 “사실 통이 크고 선이 굵은 데다 애국심이 강한 조 박사 같은 분이 살아 계셨더라면 내가 5·16 혁명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또한 나는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는 박 대통령의 뛰어난 용인술에도 감탄한 일이 있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앞두고 박 대통령이 외교관 출신이 아닌 이동원(李東元)씨를 외무부 장관에 기용한다는 설이 나돌 때였다.
하루는 정일영(鄭一永) 외무차관이 나를 만나 이동원 씨의 외무장관 기용을 외무부의 거의 모든 직원들이 반대한다면서 나에게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직언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나 자신도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어 박 대통령을 면담하기 위해 청와대로 들어갔다.
“이동원 씨의 외무장관 기용을 거의 모든 외무 공무원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재고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면서 나는 몇 가지 이유를 설명했다. 그랬더니 박 대통령께서 “그러면 이 의원은 누가 좋다고 생각하는가”하고 물었다.
“최규하 대사(당시 주 말레이시아 대사)같은 분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 최 대사도 자격이 있지. 그러나 평시 같으면 그런 분도 좋지만 한·일 회담의 성사와 국회 비준을 위해서는 틀에 박힌 외교관 출신보다 다소 저돌적이라도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는 이동원 씨 같은 사람이 좋지 않을까…….”
그 순간 나는 박 대통령의 용의주도한 용인술에 내심 놀라면서 “각하의 말씀을 들으니 그 깊은 뜻을 이해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청와대를 나온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연대(延大) 선배인 이동원 씨가 한때 나에게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국회 외무위 소속인 나와 자주 만나면서 퍽 가깝게 지내기도 했다.
또한 이 책에도 나오지만 박 대통령은 다재다능한 이후락 씨도 적재적소에 기용하여 활용하는 주도면밀한 용인술을 보여주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