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공화국 출범 후 맞은 최초의 위기는 역시 1964년의 한·일 회담 문제였다. 양국간 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 회담이 시작되자, 야당과 각계 인사들은 ‘대일(對日) 굴욕 외교 반대 범汎국민투위’를 결성해 한·일 회담 반대 투쟁에 나섰다.
바로 그런 때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당시 일본 외상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간에 맺어진 ‘김·오히라 메모’가 언론에 보도되자 반대 투쟁은 더욱 격렬해지고 전국의 학생들까지 들고 일어나게 됐다.
‘김·오히라 메모’의 내용은 △무상 공여 3억 달러, 10년 분할 제공 △유상 공여 2억 달러, 10년 분할 제공 △상업차관 1억 달러 플러스 알파로 돼 있었다.
그러나 한·일 회담에 대한 나의 소신은 확고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로 보아 한국은 미·일과 협조체제를 이룩해야 하며, 따라서 일본이 한국 정부를 합법적으로 인정한다는 기본 조약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또한 우리는 경제 발전을 위해 일본의 자본이라도 활용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래도 그때 일본 자본을 끌어들여 경제 발전의 토대로 삼음으로써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앞으로의 문제보다는 민족 감정이 우선이었다. 때문에 정부·여당이 아무리 설득하려 해도 학생들과 야당은 막무가내였다. 한번은 연·고대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농성을 할 때였다. 밖에 나가 보니 유진오(兪鎭午) 고려대 총장은 고대 학생들에게 학교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고 있었고, 여당 국회의원들은 험악한 분위기에 눌려 다들 피하고 없었다.
나는 연대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 모교 후배들을 설득키로 했다. 내가 가니 처음에는 후배들도 학교 선배가 나타났다며 박수도 치고 경청했으나 내 얘기가 그들의 의도와 다르자 쉽사리 물러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내 소신을 계속 얘기했다.
“후배들의 충정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36년 동안 수탈당한 걸 생각하면 사실 36억 달러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금액이 아니라 양국이 합법 정부로서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기본 조약을 맺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 자본이 절대 부족해 외국으로부터 비싼 차관을 도입하는 판에 청구권 자금이라도 활용하는 게 급선무가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시간이 흐르고 나면 학생들은 내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소리를 지르자 학생들은 다소 수긍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학생 데모가 연일 계속되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5월에는 최두선 내각이 총사퇴하고 정일권(丁一權) 내각이 발족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6월 3일, 마침내 6·3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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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대통령 하야를 요구한 1964년 6월 3일 대학생들의 시위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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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사태는 심각한 헌정(憲政) 위기였다. 바로 전날 학생 1만여 명이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파출소를 점거, 파괴하기에 이르렀기에 서울 일원의 비상계엄은 어쩔 수 없는 조치였다.
당시 계엄군은 포고령 1·2호를 발동해 시위의 금지, 언론·출판의 사전 검열, 각급 학교의 무기(無期) 휴교, 통금 연장 조치를 취했으며, 영장 없이 압수·수색·체포·구금할 수 있었다. 계엄사령관은 민기식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서울 진주(進駐) 계엄군은 김재규 육군 소장이 이끄는 사단이었다.
그런데 계엄 바로 다음 날이었다. 갑자기 김재규 장군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궁금한 나는 곧 계엄군 임시 사단본부가 있는 덕수궁을 찾았다.
김재규 장군은 나의 모교인 대륜중학교 교사로 계셨던 분이다. 5·16후 군에 복귀한 이후 나와는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김 장군은 나를 반갑게 맞으며, “누가 엿들으면 곤란하니 잠깐 이쪽으로……” 하며 날 사단장실에서 밖으로 불러내어 뜰에 있던 앰뷸런스 안으로 데려갔다.
10·26 이후 김재규 장군을 보고 치밀하지 못하다는 이야기도 많았으나 이때 김재규 장군은 이처럼 치밀했다.
앰뷸런스 안에서 내게 한 말은 충격적이었다.
“지금 계엄군의 공기는 비록 데모는 진압됐지만 나라를 위해 이번 기회에 문제가 되고 있는 몇 사람을 체포해야겠다는 분위기요. 대상은 야당의 김준연(金俊淵), 서민호(徐珉濠) 의원과 함께 여당의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오. 문제는 군(軍)의 공기가 이러한데 이걸 대통령께 말씀드려 일을 순조롭게 처리할 사람은 이 의원밖에 없을 듯하오. 그러니 대통령께 말씀 좀 드려주시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