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장군은 계속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김종필 의장은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파친코 사건 등 4대 의혹 사건으로 군의 불신을 받고 있고, 김준연, 서민호 의원은 한·일 회담에서 대통령이 일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발언을 국회에서 한 때문이지요.”
“잘 알겠습니다.”
나는 사태를 사전에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김종필 씨는 공화당 의장이기에 그에게 미리 알려주어 스스로 결심하도록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는 1차 외유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터였다. 그리고 당시 상황은 제3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박정희 정권이 맞은 최악의 위기상황이었고 어떻게든 시국을 수습해 놓고 봐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김종필 의장의 행방을 이곳저것 알아보니, 그는 마침 민기식 참모총장 공관에 가 있는 게 확인되었다. 급하게 그곳으로 가보니 이미 그곳에는 민기식 총장과 김종필 의장뿐만이 아니라 김성은(金聖恩) 국방장관, 그리고 JP 직계인 김종갑(金鍾甲) 국회국방위원장도 함께 뜰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국방색 작업복을 입고 있던 김종필 의장은 대충 분위기를 파악하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김성은 국방과 민기식 총장은 마침 그날 아침에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군의 분위기를 보고했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김 의장에게 그런 분위기를 직접 말해 주지 않고 뭘 하고 있어” 하는 핀잔만 듣고 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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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사태 수습책에 의한 김종필 당의장의 사퇴론은 많은 억측을 낳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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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들어가 보니 그들은 차마 김종필 의장에게 그 얘기를 바로 못한 채 말을 빙빙 돌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김종필 의장에게 말했다.
“……그러니 김 의장께서 2보 전진을 위해 1보 후퇴하십시오.”
그러나 김종필 의장은 굳은 표정으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가 알기론 군 전체의 분위기가 다 그런 건 아니고, 박경원(朴璟遠) 장군(후일 내무부 장관) 등 일부 장군들이 내게 감정이 있어 그런 것 같소. 그리고 내가 당의장을 물러난다면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누가 맡아서 각하를 보필할 수 있겠소? 또 만약 내가 물러나야 한다면 나를 모함하고 있는 장경순 부의장과 김성곤(金成坤) 의원도 같이 물러나야 하지 않겠소.”
다소 감정이 격한 모습이었다. 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만두는 데 누구와 함께 그만두겠다고 할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또 누가 당을 맡아 하건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며, 만일 후임자가 시원찮으면 각하께서는 더욱 김 의장을 아쉬워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학생 데모가 워낙 심각하니 우선 나라를 살려놓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나라를 위해 1보 후퇴하십시오. 나는 사심 없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종필 의장은 듣고만 있을 뿐, 별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은 그렇게 헤어졌는데, 다음 날 청와대 비서실에서 박 대통령이 급히 찾는다는 연락이 왔다. 청와대에 올라가니 박 대통령이 나를 부른 것은 김성은 국방장관과 민기식 참모총장이 박 대통령에게 김종필 의장을 만난 결과를 보고하면서 “어제 그 자리에서 이만섭 의원이 나타나 김 의장에게 군의 사정을 설명해 주고 그만둘 것을 강력히 종용하더라”고 보고했던 것이며, 그래서 대통령이 보다 상세한 내용을 알기 위해 나를 부른 것이었다.
나는 전날 있었던 일을 대통령에게 소상히 전하면서 김종필 의장과 나 사이에 오고 간 이야기들을 모두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박 대통령은 “지금 상황이 이렇게 급한데 조건을 이야기할 여유가 어디 있는가?”라고 못마땅해 했다. 그래서 나는 “아무래도 사태가 급하니, 지금 각하께서 김 의장을 부르시어 스스로 결단을 내리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내 말이 끝나자 박 대통령은 곧 부속실의 김성구(金聖九) 비서관(후일 대사)을 불러 김종필 의장을 급히 찾아오도록 했다. 나는 대통령과 함께 한참 기다리고 있었으나, 너무 시간이 늦을 것 같아 청와대를 나왔다.
그 후 안 일이지만 김종필 의장은 그날 저녁 늦게서야 연락을 받고 청와대에 올라가 박 대통령과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바로 그날 저녁 김종필 의장의 사임을 알리는 호외가 시중에 나돌았다. 다음 날 김종필 의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고 공식으로 태도를 밝혔다. 결국 며칠 뒤 정구영 의원이 당의장 서리에 임명됐고, 김종필 씨는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것의 그의 2차 외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