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가을에는 한비(韓肥) 밀수 사건이 터져 정계가 한바탕 뒤집히고 말았다. 온 국민이 분노했고, 국회에서는 ‘특정 재벌 밀수 사건’이라는 안건으로 9월 22일부터 10월 6일까지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들을 출석 시킨 가운데 열띤 대정부 질문을 벌이게 됐다.
22일 아침 등원하러 집을 나서면서 나는 비록 여당 소속이었지만 이 사건만큼은 철저하게 따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본회의장에 들어선 나는 우선 권효섭(權孝燮) 의사국장을 통해 그날 발언 순서가 야당의 김대중 의원, 김두한 의원임을 확인하고, 이 엄청난 사건을 파헤치는 데는 여야가 따로 없다고 생각돼 내가 먼저 의사 진행 발언 신청을 했다.
제일 먼저 등단한 나는 아주 강경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며칠 전 이병철 씨가 천인공노하게도 사카린을 밀수하여 온 국민을 격분시켰습니다. 그러나 국회는 무얼 했습니까. 서울시의 육교가 어떠니 뭐니 해서 이틀씩이나 시간을 허비했습니다. 이런 중차대한 때에 서울 시정 문제로 이틀씩이나 시간을 허비해야 되겠습니까. 여야 총무단은 무얼 하고 있습니까. 나는 여기에 대해 불만입니다. 그리고 이병철 씨는 왜 구속하지 않습니까.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최고의 형形을 적용해야 합니다. 또 부산 세관장은 왜 잡아넣지 않는 겁니까. 그 사람은 직무유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가중처벌법 제15조에 의하여 1년 이상의 형을 받도록 돼 있습니다…….
지금 정부에서 수사하는 것을 보면 송사리만 잡는다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 국회는 국민의 여론을 항상 존중하여 국정을 올바로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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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회 본회의에서 사카린 밀수사건을 규탄하며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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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뒤를 이러 민중당의 김대중 의원도 삼성의 부당이득에 관해 조목조목 따지면서 이병철 씨의 즉각 구속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등단한 한국독립당의 김두한 의원의 발언 때 국회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날 아침부터 다소 이상한 낌새는 있었다. 그날 아침 김두환 의원은 흰 보자기에 깨끗하게 싼 두 개의 통을 양손에 들고 의사당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는 알다시피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아들로, 해방 이후 반공 투쟁에 앞장섰던 정의감에 불타는 열혈남아의 기개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1954년 5월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종로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거물 변호사인 한근조(韓根祖) 씨를 누르고 당선되었으며 그 후 제6대 국회에서는 민중당 서민호 의원이 한·일 회담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실시된 서울 용산구 보권선거(1965년 11월)에서 한국독립당 후보로 나서 두 번째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성격이 쾌활하고 다정다감하며 남달리 달변이었다. 그래서 태평로 의사당(지금의 서울시 의회)에서 오전 10시 본회의가 개회되기 전에는 많은 의원들이 김두한 의원의 주변에 모여 그의 유머 섞인 재미있는 얘기를 들으며 한바탕 웃곤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에 모셨던 조병옥 박사나 유진산 의원에 대해서는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와는 나이 차이가 많았으나(김두한 의원은 1918년생) 서로 통하는 데가 있어 아주 가까운 친구처럼 지냈다. 그랬기에 난 그에게 물어봤다.
“김 의원 그거 뭡니까?”
“아, 이거 사카린이야.”
“아! 그게 사카린……. 내가 첫 발언을 하게 돼 있는데 사카린이 어떤건지, 그럼 어디 한번 봅시다.”
나는 정말 사카린이 어떻게 생겼나 보고 싶어 그 통을 만지려 했다. 그런데 김두한 의원은 그 날따라 굳은 표정으로 “아니, 안 돼요! 나중에 어차피 보게 될 텐데……” 하며 아예 손도 못 대게 막았다.
드디어 김두한 의원이 연단에 올라섰다. 그는 두 개의 통을 조심스레 연단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배운 것이 없어서 말은 잘할 줄 모르지만, 다른 사람이 할 줄 모르는 행동은 잘할 수 있습니다.”
다소 무겁게 말을 꺼낸 그는 점차 시간이 흐르자 자신의 항일 투쟁, 반공 투쟁 경력 등을 소개하며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5·16 군사 혁명을 일으킨 현 정권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또 국민의 참정권을 박탈하는 것까지는 용서할 수 있으나, 전 국민의 대다수를 빈곤에 몰아넣고 몇 놈에게만 특혜조치를 주고 있는 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이 나와 여기 나왔다면 한번 따져보고 싶지만 없으니 국무총리를 대통령 대리로 보고, 또한 총리와 장관들은 3년 몇 개월 동안 부정과 보패를 합리화한 피고로 다루겠습니다.”
처음에 싱글싱글 웃으며 김두한 의원의 얘기를 듣던 대다수 의원들은 차츰 그의 표정이 진지해지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