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박 대통령의 화난 얼굴은 무섭다는 말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무거운 침묵이 1분 정도 흘렀다. 그때 맨 끝에 앉아 있던 나는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노기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연신 담배를 피우고 있던 박 대통령에가 나는 순 경상도 억양으로 애원조로 말했다.
“각하, 고마 한 번만 봐주이소.”
나의 난데없는 경상도 사투리 애원에 박 대통령도 웃음을 참지 못했으며 다른 사람들도 웃음을 참다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살벌했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뒤바뀌는 듯했다. 나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다시 한 번 간청했다.
“각하, 그만 저희들한테 맡겨주십시오. 잘해 보겠습니다.”
그 제서야 박 대통령도 웃음을 못 참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으며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했다. 우리 모두는“예!” 하고 대답이 끝나자마자 허겁지겁 청와대를 빠져나오기 바빴다. 나는 청와대를 나오면서 김진만 총무에게 “도리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해야지…… 어떡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회기 종료 40분을 남긴 밤 11시 20분에야 국회에 도착한 우리는 전열을 정비하여 단상을 점거하고 있던 야당 의원들을 여당 의원들이 밀어내고 회기 종료 직전 석유류 세법 개정 법률안을 강행 통과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국회에서 석유류 세법 개정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더라면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중단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만큼 국가 경제를 위해 중대한 사안을 왜 야당이 한사코 반대했는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후 4월 1일이는 김신조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됐다. 이때도 말이 많았다. 예비군법 통과를 두고 야당과 타협이 되지 않아, 결국 야당이 불참한 가운데 5월 초 여당 단독으로 통과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5월에 일어나 대사건은 ‘복지회’사건이었다. 복지회 사건은 친 김종필계가 중심이 되어 공화당의 공조직과는 별도로 김종필 의장을 정점으로 하는 ‘복지회’라는 전국적인 사조직을 만든 데서 비롯됐다. 즉 박 대통령의 후계자로 김종필 의장을 공식화한 것이었다.
박대통령은 대로(大怒)했다.
“취임한 지 아직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후계자 운운하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도전으로 용서할 수 없는 항명이니 주동자를 색출해 엄단하라.”
결국 5월 25일 주동자인 김용태・최영두(崔永斗) 두 의원이 공화당에서 제명됐다. 이어서 30일엔 김종필 씨가 공화당 의장과 국회의원직을 모두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며, 윤치영 씨가 그 뒤를 이어 당의장 서리에 임명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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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계자화 하려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격분을 사 김종필은 68년 5월 30일 공화당을 탈당하고 정게를 은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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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당시 김종필 계가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번째 대통령 취임 이듬해부터 벌써 후계 구도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도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김종필 씨를 인간적으로 불신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비록 박정희 대통령을 3선 개헌 당시 김종필 씨를 활용하였으며 그 뒤 유신 때는 그에게 총리를 맡기기도 했으나 그를 후계자로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 후 나는 박 대통령을 만날 때마다 느끼곤 했다.
또한 이 사건을 계기로 친 김종필 계와 반 김종필 계의 세력 다툼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나는 친 김종필 계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 김종필 계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3선 개언 전까지는 박 대통령 직계라고 할 수 있었다.
1969년 1월로 들어서면서부터 당내에서는 은근히 ‘개헌’이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요즘 개헌 여부를 당내에서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1월 6일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의 첫 발설을 계기로, 다음 날에는 윤치영 공화당 의장서리도 거들었다.
“후진 사회를 면치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가 조국 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과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 같은 지상 명제를 위해서는 대통령 연임 조항을 포함한 현행 헌법상의 문제점을 개정하는 게 연구돼야 합니다.”
역시 같은 얘기였다. 그러자 뭔가 음모(?)를 눈치 챈 신민당 등 야당에서는 즉각 ‘3선 개헌 반대’를 외치며 정가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은 사흘 뒤인 1월 10일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개헌 문제를 언급했다.
“헌법을 꼭 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 왈가왈부하는 것보다는 금년만큼은 온 국민이 힘을 합쳐 공산당과 대결하고 경제 건설을 해야 하며, 이러한 문제가 꼭 논의돼야 한다면 금년 말이나 내년 초쯤 가서 논의해도 시기적으로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박 대통령이 내심으로는 개헌을 시사하는 듯한 발언을 함으로써 3선 개헌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