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내가 말한 사전대책이란, 대통령이 권오병 장관 경질을 결심하고 그 대신 국회에서의 투표는 보류하는 등의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 말에 몇몇 의원들은 동조했다. 그러나 아무튼 그날 회의는 표면적으로는 행동 통일을 하자는 것으로 어정쩡하게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드디어 투표일이 왔다. 그날 아침 《조선일보》에는 내가 “가표를 던지겠다”고 태도를 표명한 것과 그 이유가 상세히 보도돼 있었다. 태평로 국회 의사당으로 들어서자 상당수의 의원들은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물론 신민당이 낸 해임안에 가표를 던진다는 결심을 해놓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나중에 분위기를 봐 가며 투표하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날은 어쨌든 공화당에게는 심각한 하루가 됐다. 나는 일찌감치 가표를 던지곤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투표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오는 초선 의원들 중 상당수가 내 귀에 “나도 가표를 던졌소”라고 속삭이는 게 아닌가. 나는 속으로 ‘드디어 일이 벌어졌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개표 결과는 내 예상대로였다. 총 투표수 152표 중 가표가 무료 89표였고 부는 겨우 57표, 무효 3표로 ‘권 장관 해임안’은 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투표에 참가한 공화당 의원들이 모두 100명이었으니, 최소한 40여 명 이상이 당명(黨命)을 어긴 채 신민당 쪽에 동조한 것이다.
당시 진해로 휴가차 내려가 있던 박 대통령은 현지에서 이 소식을 듣고는 노발대발 격노하여 급거 상경했다. 길재호 사무총장을 불러 사건 경위를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강경한 어조로 명령했다.
“즉시 항명 의원들을 색출해 1주일 이내에 제명해! 그리고 의원들에게 말해요. 현 체제에 불만을 가진 당원들은 모두 당을 떠나라고…….”
결국 당에서는 조사 결과 주동 의원 5명을 제명키로 하였으며, 김진만 원내총무도 물러났는데, 박 대통령은 후임자로 의외의 인물, 항명파와 친한 김택수(金澤壽) 의원을 임명했다. 총무 자리에 앉은 김택수 의원은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양순직, 예춘호(芮春浩), 박종태, 김달수(金達洙), 정태성(鄭泰成) 의원 등 주동 의원 5명을 13일 의원총외에서 자기 손으로 제명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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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오병 문교장관 해임안을 주도한 양순직 등 다섯 의원의 제명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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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목(?)은 ‘음성적으로 야당과 내통해 반란을 일으킨 자’였으며, 나 역시 처음에는 제명 대상에 올랐으나 내 경우에는 음성적이 아니라 의원총회에서 사전에 내 태도를 분명하게 밝혔기에 마지막 순간에 박 대통령이 내 이름을 뺐다고 한다.
아무튼 이 ‘4·8 항명’사건은 그들이 어떤 이유로 항명했건 결국 김종필계에게 큰 타격을 안겨주었다. 또한 그건 공화당 내 3선 개언 반대 세력들에겐 심각한 타격을 주는 결과를 낳았다.
기세를 탄 개헌파들은 한 달 뒤인 5월 7일 여론이 잠잠해진 것을 계기로 다시 포문을 열었다. 윤치영 당의장서리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이다.
“이제 개헌 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할 준비가 돼 있다.”
그리고 이틀 뒤 김재순 대변인의 이름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개헌 문제는 공화당이 아니더라도 당을 초월해 허심탄회하게 신중히 고려해야 할 때이며, 이에 대해 국민들의 깊은 고려가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바야흐로 정국은 본격적인 개헌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다. 아울러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나로서도 박 대통령과의 관계에 있어서 큰 변화를 감내해야 할 시점이 다가왔다.
13. “각하, 후계자가 잘하면 다시 집권할 필요 없습니다”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건으로 3선 개헌 반대 세력이었던 김종필계가 상당히 위축되자, 개헌 작업은 더운 표면화됐다. 대통령의 측근인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백남억 정책위의장 등은 개헌을 반대하는 국회의원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해 개헌 지지를 설득하고 아예 찬성 도장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특히 김형욱 부장은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에게 온갖 회유와 협박, 공갈로 찬성 도장을 받아내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이 같은 바람은 물론 내게도 불어 닥쳤다. 그러나 내가 이미 의원총회 등에서 공개적으로 개헌을 반대하는 등 강경한 입장이었기에, 그들은 내게만큼은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이 의원…… 개헌 문제 좀 얘기합시다…….”
“그거라면…… 그건 절대 안 됩니다.”
김성곤 의원이 내게 넌지시 의향을 타진했지만 나는 본론이 나오기도 전에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그러자 다음에는 길재호 의원이 나를 두 번씩이나 찾아와 마음을 돌릴 것을 종용했으나 역시 거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