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의 설득과 나의 반론 (...

안 되겠다 싶었던지 그들은 결국 박 대통령에게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만섭 의원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됩니다……. 이 의원만큼은 각하께서 직접 불러서 설득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이 의원은 내가 한번 불러 이야기해 보지…….”

결국 박 대통령은 나를 불렀다.

그날은 1969년 6월 29일이었다. 오후 3시쯤이었는데, 몹시 무더운 날이었다. 나는 들어가기 전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대통령을 내가 설득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들어갔다.

서재로 들어선 나는 박 대통령의 얼굴이 다소 굳어져 있음을 느꼈다. 차를 한 잔 권한 박 대통령은 먼저 3선 개헌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을 말하며 협조를 부탁했다.

그러나 단단히 마음을 먹고 간 나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5·16형명이 아무리 구국(救國) 혁명이었다 하더라도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것만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이 군사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대통령께서 직접 만든 법을 스스로 지켜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리입니다.”

내 말에 대통령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4·19 때 《동아일보》정치부 기자로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지켜본 바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함으로써 학생혁명을 유발시켰고, 결국 이 박사의 동상을 학생들이 넘어뜨려 새끼줄로 목을 매단 채 광화문 거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한 바 있습니다.”

▲ 청와대에서 육영수 여사, 영식 박지만과 함께 / 육영수 여사 바로 왼쪽은 이낙선 민정수석 비서관

이 말은 ‘각하도 장기집권하게 되면, 나중에 학생이나 국민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라는 말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것이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정권을 야당에게 빼앗기고 말 텐데…….”
“그런 그렇지 않습니다. 각하께서 물러나시면 ‘내가 못다 한 일을 바로 이 사람, 나의 후계자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국민 앞에 한 말씀만 하신다면, 그 사람은 틀림없이 당선됩니다. 왜 정권을 빼앗긴단 말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후계자가 될 사람은 있는가?”

박 대통령은 짜증스런 투로 내게 물었다.

“각하께서 김종필 씨가 후계자로 내키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도 있잖습니까? 이효상 씨나 백남억 씨 같은 분도 좋지 않습니까. 그분들 중 한 분에게 4년간 맡긴 뒤, 4년 후에 다시 정권을 잡으시면 되잖습니까?”

박 대통령은 내 말에 버럭 화를 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된 사람이 자기 조직을 짜고 군대 조직까지 다 장악할 텐데 4년 후에 ‘정권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놓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이 말에 다소 반발심 같은 게 생겼다.

“각하! 만일 후계자한테 맡겨서 그분이 일을 잘하면 꼭 각하께서 다시 하실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 말에 박 대통령은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허리에 권총이라도 차고 있었다면 금방이라도 빼서 쏠 뜻한 기세였다. 그래서 나는 박 대통령의 노기를 풀기 위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럴 때에는 나라의 큰 지도자로서 후배 대통령을 뒤에서 도와주시고, 또 나라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자 대통령은 잠깐 동안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한동안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아마 박 대통령은 좋은 의미에서는 한 4년 더 국정을 맡아 벌여놓았던 일을 마저 마무리 지었으면 하는 집념이 강했다고 할 수 있고, 또 달리 생각하면 나 말고는 이 나라를 이끌 사람이 없다는 독선에 사로잡혀 있었다고도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간곡하게 3선 개헌은 안 된다고 계속 주장했다.

“저는 이 나라가 민주주의를 꽃피우려면 두 가지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평화적인 정권 교체입니다. 그러나 그건 반드시 야당에게 정권을 넘겨준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결코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치 보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이 두 가지가 민주주의의 요체라고 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실 각하 주의에서 개헌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진정 나라를 위하는 마음보다는, 정권을 내놓게 되면 자기들이 죽는다고 생각돼 자기들이 살기 위해 개헌하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