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잘 지키시오. 목숨 걸고 투...

혹자는 나의 이 선행 조건이 김성곤 의원 등 대구·경북 출신 의원들과 사전에 의논해서 만든 게 아니냐고 추측하는 이도 있지만, 그건 사실과 전혀 다르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성곤 의원은 이후락 실장 등과 같은 개헌 추진 세력이었으므로 이들과 등을 돌릴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나 자신 또한 이 중요한 일을 누구를 믿고 사전에 의논한다는 말인가.

전에 어느 월간지에 실린 ‘박 대통령의 용병술’ 이란 글에서 모 중진기자는 “아무리 이만섭 의원이 용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과 김형욱 정보부장의 해임을 요구하는 그런 발언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느냐. 사전에 박 대통령과 이야기를 안 했을 리 없다”고 썼으나, 그것도 박 대통령의 용병술을 과대평가하기위해 쓴 기자의 추측에 불과하지 사실과는 전혀 달랐다.

선행 조건을 다 쓰고 다시 한 번 읽어본 후 집사람을 불렀다.

“여기 5개 선행 조건 중 이후락 ․ 김형욱을 물러나라고 한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오. 그러나 난 내일 의원총회에서 반드시 발언하고야 말 것이오. 그런데 문제는 내가 그 말을 하면, 김형욱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는 것이오. 알다시피 김형욱은 김영삼 의원의 얼굴에 초산을 뿌리려고 하지 않았소. 그리고 초산을 뿌렸던 하수인은 한동안 오리무중 자취를 감추었다가, 그 후 인천 앞바다에서 떠오른 시체 2구가 그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소. 나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이 없으니, 내일 당신의 집을 깨끗이 치워주시오. 혹시 습격 받더라도 뒤를 깨끗이 해놓아야 하질 않겠소.”

집사람도 이러한 나의 소신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무거운 표정으로 입술만 깨물고 있었다. 정치인의 아내로서의 비애가 아닐 수 없었다. 집사람이 서재에서 말없이 나간 뒤 난 내 책상 서랍을 말끔히 정리하고 내일이 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날이 밝았다. 나는 선행 조건을 적은 메모지를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불안한 표정으로 말없이 문밖까지 따라 나온 집사람에게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집을 잘 지켜주시오. 난 오늘 목숨을 걸었소.”

▲ 7대 국회 본회의에서 사직공원 부정불하 사건을 추궁하고 있다 / 왼쪽부터 박경원 내무장관, 황종률 내무장관

의원총회 장소는 영빈관이었다. 지금의 신라호텔 별관 자리였다. 사안이 사인인지라, 처음부터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의원총회는 예정보다 40분 늦은 오전 10시 40분이 돼서야 시작됐다. 공화당 소속 의원 109명 가운데 101명이 참석했다. 김택수 원내총무가 회의 개시를 알리면서 역사적인 ‘영빈관 의원총회’는 드디어 시작됐다.

의원총회는 처음부터 파란의 연속이었다. 맨 처음 발언대로 나온 사람은 정구영(鄭求瑛) 의원이었다.

“나는 평소 소신대로 개헌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간단하게 한마디로 소신을 밝히고 자리로 돌아가자, 이때부터 의원들 간에 찬·반 양론이 물꼬를 트고 넘치기 시작했다. 선행 조건을 적은 쪽지를 가슴속에 품은 나는, 처음엔 김종필계의 의원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김종필계 의원들은 아무런 권한도 없는 윤치영 장의장서리에게만 산발적으로 공격을 퍼부을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로는 처음 개헌에 반대하던 김종필 씨가 이미 며칠 전 박 대통령과 만난 뒤부터 마음을 돌려 개헌 쪽으로 선회해 있었으며, 때문에 자파 의원들에게 개헌안에 찬성할 것을 오히려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몇 의원들은 김종필 씨의 설득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종필 씨가 개헌 반대에서 찬성 쪽으로 돌아선 데 대해서는 당치 ‘처삼촌(대통령)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는 설과 ‘생명에 위협을 받는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설도 있었다. 아무튼 이로 인해 그는 영영 대권을 잡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화당 내에서 끝까지 개헌에 반대한 사람은 정구영 전 당의장과 나 둘이었다. 그리고 역시 끝까지 반대한 예춘호, 양순직 의원 등은 권오병 장관 해임 건으로 이미 공화당에서 제명되어 무소속으로 있었다. 그 후 정구영 전 당의장은 월북한 아들 문제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30대 정치인인 나는 정계 은퇴보다는 정면 돌파하기로 결심하고 선행 조건을 제시했다.

아무튼 회의는 진통에 진통을 거듭했다. 이날은 영빈관 밖 출입이 완전히 금지 돼 식사도 건물 안에서 하게 했다. 점심을 먹은 후에도, 또한 저녁 식사를 마친 후까지도 반대파와 찬성파의 이견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의견 접근이 되질 않자 윤치영 당의장서리 등 당 5역은 옆방으로 들어가 대책을 숙의했으나, 결론은 당 5역 모두 사의를 표했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날의 회의는 심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