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로(大怒)한 박 대통령 (제53회...

내가 발언권을 얻어 연단 위에 섰을 때, 이미 밖에서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나는 근본적으로 3선 개헌에 반대해 왔습니다. 지금도 그 소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대통령께서는 나라를 위해 꼭 한 번만 더 한다고 하시는데 그렇더라도 우리 공화당에서 먼저 자가 숙정부터 하고 나서 국민에게 고개 숙여 양해를 구하는 것이 정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러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잠깐 숨을 멈춘 후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는 개언에 대한 선행 조건으로 5개 항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첫째, 권력형 부정부패의 책임자 이후락, 김형욱은 그 책임을 지고 즉각 물러날 것…….”

그러나 내가 채 다음 항목을 말하기도 전에 장내는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후락·김형욱’이란 이름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다섯 가지 선행 조치를 모두 말하고 나자 의원들은 그 제서야 정신(?)이 들어 박수를 치기도 하고, 심지어 책상을 두들기면서까지 열렬히 지지했다. 이는 그만큼 두 사람이 대다수의 의원들의 원한을 사고 있었다는 증거였다.

개헌이냐 아니냐로 팽팽하던 균형은 내 제의로 일순간에 변화가 생겼다. 즉 반대파들도 내 선행 조건에는 전적으로 찬동했던 것이다. 나의 선행 조건은 곧바로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나로서도 그 정도까지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때는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 2시로 치닫고 있었다.

그러나 변수가 생겼다. 그때까지 밤잠을 자지 않고 의원총회 결과를 기다리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일언지하에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만장일치로 채택된 내 선행 조건을 들고 김성곤 재정위원장과 장경순 부의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으러 청와대로 들어갔으나, 박 대통령은 책상을 걷어차고 컵을 내던지면서 화를 벌컥 냈다는 것이었다.

“뭐야? 누가 이따위 선행 조건을 냈어? 뭐? 이만섭 의원? 이 의원 지금 어디 있어! 도장을 찍으려면 찍고 말려면 말지, 선행 조건은 무슨 선행 조건이야?”

▲ 김영삼 당시 원내총무와 3선개헌 반대를 위해 본회의장에서 심각하게 밀담을 나누고 있다

아무튼 박 대통령의 격노에 김성곤 의원과 장경순 부의장은 혼비백산해 그냥 돌아왔고, 만장일치로 채택된 선행 조건은 자칫 유야무야될 판이었다. 그러나 나는 소신을 굽히지 않은 채 다시 연단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건 당 간부들의 설명이 부족했기 때문일 겁니다. 대통령과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대통령께서 그렇게 화를 낼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설명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니, 당 간부들은 다시 가서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지 개헌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내 말에 모두들 찬성이었다. 이번에는 장경순 부의장이 혼자서 청와대로 가기로 했다. 김성곤 의원이 갑자기 배탈이 나 신문로(新門路)에 있는 자기 집으로 죽을 먹으러 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장경순 부의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해프닝이 벌어졌다.

우리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앙정보부에서 그날 회의의 모든 발언을 도청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내가 “이후락, 김형욱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고 한 말도 김형욱의 귀에 즉각 들어가게 되었다. 흥분한 김형욱은 곧장 청와대로 달려가 이후락 비서실장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만섭이가 우릴 쫓아내려고 한다. 내 이만섭을 죽여 버리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김성곤이도 미리 잡아넣을걸 그랬어.”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형욱, 김성곤은 의원총회 며칠 전, 무슨 일인가 서로 욕설까지 하며 언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내가 한 발언을 두고 김형욱은 경북 출신 의원들, 특히 김성곤 의원과 사전에 의논해 선행 조건을 제시한 거라고 의심을 하여 김성곤 의원에게도 화를 냈던 것이다. 그러나 눈치 빠른 이후락의 대응은 달랐다.

“의원총회까지 우리 문제가 비화됐다면 이제 우리가 그만두는 길밖에 없겠구먼.”

그러나 문제는 김성곤 의원과 가까운 비서실의 한 직원이 김형욱이 고함지르는 것을 듣곤 김성곤 의원의 집으로 몰래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그것도 “잡아넣을걸 그랬어”라는 말이 “잡아넣겠다”는 말로 와전되어 전해졌다.

이번에는 집에서 죽을 먹다가 그 얘기를 전해들은 김성곤 의원이 흥분해 죽을 먹다 말고 급하게 의원총회장으로 달려 나와서 그 사실을 알렸다.

“지금 우리는 의원총회에서 이후락·김형욱 두 사람의 퇴진 얘기를 하고 있는데, 김형욱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날 잡아넣으려 하고 있소.”

정확하게 ‘잡아넣으려 한다’고 했는지, 아니면 ‘잡으러 온다더라’고 했는지는 잘 모르나 아무튼 이 말에 이번에는 의원들이 흥분하면서 총회 분위기는 극도로 들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