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시간 의원총회, 정보부서 도청...

사태가 이렇게까지 막다른 길로 치닫자 나는 ‘이젠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마음으로 다시 단상에 올랐다.

“이후락과 김형욱을 이 자리에 불러냅시다. 불러내서 이 자리에서 사표를 받읍시다. 어차피 어느 쪽이 죽든지 살든지 할 판인데, 두 사람을 불러내 결판을 냅시다. 김형욱이가 기관단총을 가지고 오든, 권총을 들고 오든 아무튼 오늘 결판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토록 분위기가 흥분돼 있는 사이에 두 번째로 청와대에 갔던 장경순 부의장이 돌아왔다. 모두들 시선이 단상에 오른 장경순 부의장에게 집중됐다.

“다시 말씀드렸더니, 대통령께서는 ‘모든 것을 잘 알겠고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니 그 문제는 나한테 맡기고 개헌안에 서명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대통령께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공은 대통령의 손으로 넘어간 셈이 되었다. 의원들의 흥분도 그제서야 가라앉았고, 김택수 총무는 서둘러 회의를 끝내려 했다.

“여러분! 이만하면 되지 않았습니까? 이것으로 의원총회를 끝내려고 하니 개헌안에 서명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이왕이면 확실하게 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단상에 올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대통령에게 맡기는 건 나도 찬성합니다. 그러나 대신 1주일 후 다시 의원총회를 열어야 합니다. 그 기간 내에 대통령께서는 두 사람을 반드시 조치해 주어야 합니다. 아무튼 일주일 후 다시 의원총회를 열기로 결의하고 끝내야지, 그냥 막연하게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나의 제안을 모든 의원들이 지지해 죽었고, 이어서 의원들이 개헌안에 서명함으로써 마침내 총회는 끝났다. 그때는 벌써 30일 새벽 4시 40분이었다. 우리나라 정치사상 최장 기록인 18시간 동안의 의원총회였다.

▲ 3선개헌 공화당 의원총회를 보도한 69년 7월 3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밖으로 나오자 여름비가 퍼붓고 있었다. 그날따라 비 오는 밤거리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더구나 김형욱이 내 말을 모두 도청하지 않았던가.

“이 의원님, 차 좀 태워주세요.”

누군가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심상기沈相基《중앙일보》기자(일요신문사장 역임)였다. 내게 의원총회의 결과와 과정에 관해 취재를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그를 내 차에 태웠다. 나는 평소 그를 좋아했고, 또 한편으로는 혹시 내가 변을 당하더라도 목격자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영빈관에서 동대문으로 해서 안국동을 거쳐 광화문에 다다를 때까지 나는 심상기 기자에게 의원총회 얘기를 해주었다.

나는 광화문에서 차를 세웠다. 그리곤 내 차를 뒤따라오던 《중앙일보》지프에 심상기 기자를 태워 보낸 뒤, 우리 집이 있는 서대문 로터리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차가 고려병원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다른 곳에서 자는 게 좋겠다.’

우리 집 바로 맞은편에는 어둑한 골목길이 있었는데, 사람이 매복하기에 적당한 장소였다. 나는 곧바로 차를 미아리 쪽으로 되돌렸다. 친척 동생 집으로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친척 동생 집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는 아침이 되자 혹시 전화통화가 도청돼 내 위치가 알려질까 봐 그 집에서 전화하지 않고 운전기사를 시켜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고 있을 우리 집에 공중전화로 연락하도록 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청와대에서 날 찾고 있다는 게 아닌가. 아마 내가 내건 선행 조건에 대해서 대통령이 직접 알아보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날 오후 3시 청와대에서 박 대통령을 만난 나는 심경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나라를 위해서 부득이 개헌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먼저 국민에게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뜻에서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개헌을 하더라도 이렇게 해야만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어서 나는 선행 조건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다. 굳은 표정의 박 대통령은 내 말을 다 듣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런데 이만섭 의원의 순수한 마음이야 내가 이해하지만, 김성곤 재정위원장은 그게 뭐야? 그 사람들(이후락 · 김형욱)하고 밤낮 이마를 맞대고 일해 오다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짓이야?”

아마 김성곤 의원까지 나서서 ‘이후락 · 김형욱을 물러나라’고 하는 내 선행 조건에 동조하는 게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나는 내가 만든 선행조건의 내용을 설명하고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