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이 은밀히 약속한 김형...

대통령이 저토록 두 사람을 틀림없이 조치한다는데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뜻을 표했다.

“그러시다면 내일 의원총회의 공기를 그런 방향으로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김택수 총부에게도 한 말씀 해놓으시죠.”

사실 의원총회 분위기를 바꾸는 것은 내게 달려 있었다. 내가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의원도 그런 위험한 문제를 앞장서 이야기하기 어려운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이와 같은 밀약을 나누고 나왔다. 그러나 사실 집에 돌아와서도 나는 박 대통령이 국민투표 이후에 과연 그 두 사람을 자를 수 있을지 회의가 들었다. 다만 너무 내게 인간적인 정으로 호소를 해왔기에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광화문에 있는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는 예정대로 의원총회가 열렸다. 나는 박 대통령과 약속한 바 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고, 대통령에게 뭔가를 귀띔 받은 김택수 총무도 조심했기에 이후락ㆍ김형욱 해임 얘기는 나오지 않고 지나갔는데 의외로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정간용(鄭幹鎔) 의원이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지른 것이다.

“오늘까지 이후락ㆍ김형욱 두 사람을 바꾸기로 했는데, 왜 아직 바꾸지 않고 있소? 난 이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머리를 삭발하겠소.”

말을 마친 정간용 의원은 본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나는 바로 그를 쫓아가 소매를 붙잡고 달랬다.

“나를 믿고 머리를 깎지 마시오. 상세한 이야기는 내 나중에 해드리겠소.”

대통령과 밀약이 있었다는 얘기를 차마 할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정간용 의원은 끝내 날 뿌리치고 나가버렸다.

얼마 뒤 의원총회장으로 돌아온 그는 정말 머리를 빡빡 밀고 들어왔다. 나는 그의 행동에 감탄했다. 공화당에도 진짜 국회의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의 삭발에도 불구하고 그날 의원총회에서 박 대통령에게 일임하기로 하고 이후락, 김형욱의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 3선 개헌정국에서의 정간용 의원의 삭발기사(빨간 밑줄) / 정간용 의원은 전남 완도출신으로 일제 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독립운등을 했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나는 정간용 의원의 이력을 다시 한 번 알아보았다. 역시 그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일제 때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 독립군에 가담하여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였다.

그 후로 나는 정간용 의원과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나는 자칫 불귀의 객이 될 뻔하기도 했다. 후일 중앙정보부의 한 간부와 김성곤 의원은 내게 소름 끼치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이후락ㆍ김형욱은 물러나야 한다’는 나의 의원총회 발언에 앙심을 품은 김형욱이 중정(中情) 간부 두 사람을 불러 국가 기물문서 보관함에서 수류탄과 권총을 꺼내 주면서 날 해치우라고 지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역 의원을 죽인다는 게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기에 지시받은 이 간부는 만류했다고 한다.

“그냥 정치적으로 매장해 버리는 방법을 쓰면 되지, 굳이 죽일 것까지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김형욱은 끝까지 막무가내였고, 결국 내게는 살인 지령이 내려 진 것이다. 그러나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 사실을 김성곤 의원이 어떻게 알아내곤 급히 청와대로 가 박 대통령에게 알렸다고 한다.

“각하! 제가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만일 국민투표를 앞두고 이만섭 의원이 다치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고, 정국은 크게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누가 이만섭 의원을 죽이려 한단 말이오. 김형욱이 그러는 게요?”

“설사 김형욱 부장이 직접 나서지는 않더라도 과잉 충성을 하는 그의 부하들이 일을 저지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각하께서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박 대통령은 즉각 자리에서 전화로 김형욱 부장을 불러 진위를 묻곤 야단을 쳤다고 한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는데, 만일 김 부장이 이만섭 의원 몸에 손을 대기만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당시 김성곤 의원이 아니었다면 난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할 따름이다. 김형욱이 날 죽이려 했다는 얘기는 《성곡(省谷) 김성곤전》에도 자세하게 나와 있다. 아무튼 난 김성곤 씨의 덕을 본 셈인데, 지금 생각하면 김성곤 의원은 배짱도 대단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