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인한 고생은 다음날부터 곧바로 시작되었다. 6월 28일 한강다리가 끊어지자, 이젠 정말 모두가 적지에 남게 된 것이다. 게다가 29일부터는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누구든지 먹을 것을 비축해야 활 상황으로 치닫자, 하숙집에서는 하숙생에게 밥까지 끊어버렸다. 그날부터 나는 그나마 인심 좋은 집에 하숙한 이상직(당시 고대생. 후일 구미시장)과 김병렬(당시 연대생. 후일 사업) 등 중학 동기생들의 하숙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얻어먹거나 먹다 남은 누룽지를 얻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떻게 처지가 뻔한데 매번 신세를 질 수 있겠는가. 한참 먹어야 할 나이에 굶게 되니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7월 8일 나는 결국 정외과 동기인 김경덕과 함께 고향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나는 영어 사전과 책 몇권만 챙긴 채 길을 재촉했다. 김경덕의 고향은 경북 선산군 장천면이었다.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경기도 이천을 지나 장호원 쪽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그나마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배는 고팠지만 길가에서 과일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걷다가 눈에 보이는 수박이나 참외를 따먹으며 우린 무작정 남쪽으로 향했다.
| |
|
|
| |
▲ 6.25 발발 직후, 소총으로 무장한 인민군들이 남하 하고 있다 |
|
지금 생각하면 다소 무모했지만 우리가 그나마 일찍 남쪽으로 떠난 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7월 중순부터 인민군은 대학교별로 학생들을 소집하여 강제로 인민군에 편입시켰으며 또한 우리가 걸어 내려가던 당시만 해도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국군을 격파하며 남하할 때라, 우리는 생명에 위험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슨 얘긴고 하니, 나와 김경덕은 당시 인민군 전위부대 바로 뒤를 따라 남하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주 그들의 불심검문을 받곤 했는데, 우리가 학생증을 내보이며 고향에 간다고 하면 “미리 가서 환영준비나 열심히 하라우!”라고 큰소리치며 상대도 않고 우리를 그냥 무사 통과시켰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의 생각엔 앞으로 열흘 정도만 있으면 남쪽을 모두 장악할 수 있는데, 이까짓 학생 몇 명쯤이야 관심 밖이었던 것이다.
물론 알다시피 그들의 예상은 빗나가고 9월 15일 더글라스 맥아더의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혔으며, 그 이후 국군이 대반격에 나서고 인민군이 후퇴하기 바빴을 땐 우리처럼 고향에 가기위해 걸어가다가 인민군을 만난 대학생들은 거의가 다 인민군에 끌려가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그만큼 여유 있는 마음과 조급한 마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고, 우리는 온 좋게 전선의 사정이 여유가 있을 때 남하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도보로 낙동강까지는 거의 열흘이 걸렸다. 도중에 민가에 들러 밥을 얻더 먹으며 목숨을 부지했지만, 아마 우리 모습은 피골이 상접했을 것이다. 낙동강 가까이 도착하자, 난 그제야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고 있음을 느꼈다. 열흘 동안은 인민군도 아무 저항 없이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그러나 낙동강 근처는 달랐다. 하루 종일 총소리가 끊이지 않는 게 아닌가.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데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강 건너는 경북 선산 땅이었다.
김경덕과 나는 산에서 밤을 새우고 날이 밝기 전에- 마을 노인이 가르쳐준 대로 허겁지겁 산을 넘어 마침내 강가에 다다랐으며, 마지막 피난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다다른 곳은 선산군 장천면 땅이었다. 뗏목위에는 후퇴하는 우리 경찰관도 눈에 띄었다. 장천면에 도착하자 마침 대구 가는 마지막 버스가 있어 나는 급히 올라탔다. 김군과 헤어져 대구 집으로 돌아오니 그때가 7월 18일, 서울을 떠난지 열흘이 걸린 셈이었다.
정부는 16일 이미 대전에서 대구로 와 있었다. 나를 본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눈물로 맞으셨다. 아버지는 이미 적의 수중에 들어간 합천에서 정미소를 경영할 때라, 뵙지 못한 채 떨어져 있었다. 당시 전황은 대구와 부산을 빼놓고는 거의 모든 지역이 적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8월 초 부산에 가보았다. 당시 고려대는 대구에 피난해 있었으나, 서울대와 연세대는 부산으로 피난했었다. 공부를 계속할까 하고 영도에 있는 연세대 가교사에 가보니 도저히 공부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전쟁 통에 한가롭게 공부한다는 것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