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김형욱은 원내에 진출하긴 했으나 극도의 불안과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곳에서 미 의회의 청문회에 증언을 하는 등 극력한 반정부 활동을 벌였다.
그 후 그는 카지노를 하러 프랑스 파리로 갔다가 그곳에서 영원히 실종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지시했다는 설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진두지휘했다는 양설이 있는가 하면, 일본의 한 주간잡지에는 그를 청와대로 납치해 박 대통령이 직접 권총을 쏘았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이 사건의 진상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파리 주재 공사였던 이상열(李相悅) 씨가 잘 알고 잇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껏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아무튼 박 대통령은 두 사람을 교체하겠다는 나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지만 10년 뒤 ‘10·26’으로 목숨을 잃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나를 청와대로 부른 적이 없었다. 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풀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처럼 평소에는 소탈하고 인정이 많았으나, 다음 대통령 자리를 노리거나 대통령의 권위를 훼손하는 자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철퇴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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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4년 10월 20일자 동아일보의 전 파리주재 이상열 공사 인터뷰 기사 / 이 전 공사는 진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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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공화당 의장은 4대 의혹 사건과 국민복지회 사건으로 일찍부터 박 대통령의 눈 밖에 났으며, 이북 출신들이 결속하여 정일권 총리를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한다는 소문이 나돌자 은밀히 뒷조사를 시킨 적도 있었다. 최측근 심복이었던 윤필용 장군을 감옥에 가두거나, 윤필용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소문 난 이후락 전 비서실장도 7·4 남북 공동 성명을 위해 이북을 다녀온 후 그를 의심하던 차에 후계자 중 한 사람이라는 외신 기사가 나오자 그를 멀리하고 말았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5·16 후 내가 내·외신 기자를 통틀어 처음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인연을 맺은 뒤 1963년 민정 이양을 위한 대통령 선거 때는 침식을 함께 하며 유세를 다녔고, 또한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주 날 불러 의논하기도 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3선 개헌 이후 10년간 나와의 정을 끊어버린 것이다. 이후 리셉션이나 공식 행사에서 나와 마주쳐도 말 한마디 없이 싸늘했었다. 다만 1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1979년 초에 한 번 만난 적은 있었다. 천주교 대구 대구교의 서정길(徐正吉) 대주교와 대구매일신문사의 전달출(全達出) 사장 신부가 청와대를 예방했을 때, 대구 출신 의원이자 가톨릭 신도로서 자리를 함께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날도 역시 박 대통령은 내게는 별로 말을 건네지 않았다.
아무튼 3선 개헌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나는 그 후 8여 년 동안 그늘에서 엄청난 고초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시련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3선 개헌 후,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주일대사로 가 있던 이후락 씨가 갑자기 중앙정보부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역시 내가 선행 조건에서 김형욱과 더불어 권력 남용의 장본인으로 퇴진을 요구했던 사람이 아닌가.
이후락 주일대사가 불과 1년 2개월 만에 다시 중앙정보부장으로 복귀 한 것은 나에게는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큰일이다. 나라도 걱정이거니와 나 개인적으로도 틀림없이 보복을 당하겠구나.’
그러나 나 자신보다는 나라가 정말 걱정이었다. 국민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사람을 다시 요직에 등장시켰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1969년 10월에 일본으로 떠난 이후락 씨는 결국 1970년 12월, 7대 대통령 선거를 4개월여 남겨둔 상태에서 다시 복귀했다. 여기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동창이자 후일 이후락 씨와 사돈을 맺는 서정귀(徐廷貴) 씨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당시 정보부장은 김형욱의 후임으로 김계원(金桂元) 씨가 맡았는데, 그는 사람은 좋으나 추진력이 약하다는 세간의 평을 받고 있었던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서정귀 씨가 박 대통령에게 줄기차게 건의했다는 것이다.
“정보부장으로는 김계원 씨가 부적당하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이후락 씨가 맡아야 대통령 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있겠습니다.”
이후락 씨의 정보부장 복귀는 육영수(陸英修) 여사도 걱정했다고 한다. 사실 이 일은 육 여사가 길재호 공화당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했기에 나도 사전에 전해 들었던 것이다.
“길 총장님, 큰일입니다. 각하께서 이후락 주일대사를 정보부장으로 내정했습니다.”
분명 육영수 여사는 길재호 총장에게 ‘큰일’이라는 단어를 썼고, 길재호 총장은 즉시 나한테 연락을 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