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정부, 여당 내에 완벽한 자신의 추종 세력만 남겨놓는 데 성공한 박 대통령은 1년 뒤인 1972년 10월 17일 특별선언 발표와 함께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 및 정치활동을 정지시키는 등 헌정을 중단시켰을 뿐 아니라,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신문·통신에 대한 사전검열제를 실시하게 됐다. ‘10월 유신’을 단행한 것이다.
마침 이때는 국회가 예산 심의를 앞두고 국정감사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국회의원들이 상임위별로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부를 상대로 호통을 치고 소리를 지르면서 정부의 잘잘못을 따지고 있던 도중 비서진으로부터 ‘국회가 해산됐다’는 쪽지를 받고서는 책상 위의 서류도 챙기지 않은 채 한두 사람씩 슬그머니 국감장을 빠져나가는 웃지 못 할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헌법을 완전히 뜯어고쳐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대한 대통령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대통령 임기 6년과 중인 제한 철폐, 대통령의 국회의원 3분의 1 지명권,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등을 포함하는 유신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비상계엄 하에서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는 투표율이 91.9%에 찬성률 91.5%라는 경이적인 지지(?)로 통과 됐다.
유신헌법을 하나하나 검토해 본 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이는 민주주의 정면으로 역행하는 일이며, 장기 집권을 위한 편법임에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유신헌법은 한태연(韓泰淵), 갈봉근(葛奉根), 두 헌법학자가 이론적 뒷받침을 하고 청와대 실무자들의 대만의 장개석(蔣介石) 총통제와 스페인의 프랑코(Francisco Franco)총통제를 직접 현지에 가서 사전에 연구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공화당은 어디로 가는가? 박 대통령의 집권욕이 자신의 순수한 구국 의지와 지금까지의 업적마저 무너뜨리고 말겠구나…….’
대통령 한 사람이 나라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은 분명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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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 유샌체제의 시작인 국회 해산, 정치활동 정지, 대학 휴교령을 골자로 하는 1972년 10월 17일의 비상계엄 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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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당시 남산에서 유신체제가 들어선 때와 비슷한 시기에도 북한에도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헌법 개정이 있었다.
‘조선민주주의’를 명문화하여 주체사상을 강화하고 강력한 독재적 주석제(主席制) 신설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회주의 헌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문을 비롯하여 11장 149조로 구성된 ‘신헌법’은 10월의 유신이 단행된 1972년 10월 공식화돼 같은 해 12월 17일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에서 대의원 전원일치의 찬성으로 통과되어 정식 발효되었다.
남북이 비슷한 시기에 통치체제를 강화하는 새로운 헌법을 만든 것을 두고 남북 수뇌부 간의 모종의 사전 교감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설이 나돌기도 했다. 특히 남북에서 헌법 개정이 1972년 7·4 남북공동설명이 발표되었고, 그 전에 남북의 고위층이 서로 남북을 비밀리에 왕래하였다는 점은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국제적으로 동서 간에 긴장 완화 분위기가 조성되는 가운데 1972년 5월 2일부터 5일까지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비밀리에 평양으로 가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가진 데 이어 5월 29일부터 6월 1일 사이에는 박성철(朴成哲) 북한 제2부 수상 일행이 서울을 방문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남북 공동성명에 합의했던 것이다.
7·4남북 공동 성명의 핵심은 ‘자주’와 ‘평화통일’, 그리고 ‘민족의 대단결 도모’하는 3대 원칙이 있었다. 특히 남북이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는 원칙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남북 수뇌부 간에 서로 체제 변동에 대한 모종의 교감과 양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았다.
10월 유신이 단행되자 환멸을 느낀 나는 정치를 그만둘 생각까지도 했다. 비록 원외(院外)에 머물러 있었지만, 나라가 뒤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상당 기간 고민도 했지만, 그러나 누군가 공화당에 끝까지 남아 바른 소리를 해야 하는데 내가 그 역할을 해야겠다고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1972년 12월 23일에는 유신 헌법에 의한 제8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투표 결과는 총 2359표 중 무효 2표를 제외한 2357표의 찬성으로 단일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이 당선됐다.
이어 27일 박정히 대통령의 취임과 동시에 유신 체제가 출범하였다. 이에 따라 국회의원 선거법과 시행령 및 정당법도 개정됐다. 개정된 선거법은 기존의 소선거구제에서 1구 2인의 중선거구제를 채택했으며, 선거 운동도 선거공보, 선거벽보, 합동연설회만을 허용하는 등 철저한 공영제를 채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