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어 1973년이 됐다. 극회가 해산되고 유신 헌법이 발효됐으니, 국회의원 선거를 다시 해야만 했다. 그건 원외에 있던 내게는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었다.
‘지난번 선거 때는 이후락이 온갖 방해 공작으로 국회 등원을 막았으니 3선 개헌 반대로 인한 보복은 이제 그 정도로 끝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었기에 나는 은근히 공천을 기대하고 있었다.
며칠 후 후보자 명단 발표를 위해 소집된 당무회의에 참석하는 김진만 재정위원장에게 공천자 발표가 나면 곧바로 나에게 연락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정말 냉정했다. 김진만 의원으로부터 하도 연락이 오질 않아 궁금해 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난 12시 라디오 뉴스에서 내가 탈락했으며, 심지어 내게 연락하기로 한 김진만 의원까지 공천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망한 나는 당시 반도호텔에 있는 김진만 재정위원장의 개인 사무실로 가보았다. 김진만 의원은 나보다 충격이 더했다. 그는 아예 쓰러져 링거를 맞고 몸져누워 있었다.
당시 공천에 탈락한 중진은 이 밖에도 김재순, 현오봉, 구태회(具泰會) 씨 등이 있었다. 하지만 김진만 의원을 비롯한 이들은 2월 27일 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후 3월 7일에 있은 대통령 추천에 의한 73명의 명단에 끼어 3년 임기의 유정회(維政會) 국회의원으로 구제됐다. 물론 나는 여기에도 빠져 여전히 원외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유정회에서도 빠지자 차라리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유정회 국회의원은 탐탁찮게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천에서 탈락한 건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난 끝까지 박 대통령과 의리를 지키고 싶었는데……. 이젠 대통령이 날 멀리하고 의리를 끊으려 하니, 나도 공화당을 떠날 때가 됐구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책 몇 권을 읽으며 보낼 게 아니라 아예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자고 다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잡한 국내에 있기보다는 외국에 나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일본 동경대(東京大)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연구하기로 마음을 먹곤 모든 수속 절차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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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외시절, 새마을 운동 현장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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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박 대통령에게 출국 인사는 하는 게 인간적인 도리라고 생각돼 마지막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편지는 당시 수도경비사 사령관이었던 윤필용(尹必鏞) 소장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윤필용 소장은 나보다 나이는 몇 살 많았으나 학년은 같아 그가 대구중학 당시 육상 멀리뛰기 선수로 활약할 때 나는 대륜중학교의 농구 선수이자 응원 단장이었기에 그와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아는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 박 대통령의 윤필용 소장에 대한 신임 또한 두터웠기에 전달자로는 최적임자라고 여겼다.
윤필용 장군은 정말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나는 원외에 머물러 있는 야인(野人)이었음에도, 박 대통령에게 전할 편지를 갖고 필동의 수도경비사령부로 찾아가자 정문에서부터 사령관실까지 안내토록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현관 앞에까지 나와 있다가 반갑게 날 맞아주었다.
물론 학창 시절 그는 대구중학교 육상선수였고 나는 대륜중학교 응원단장으로서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오랫동안 나는 정계에서, 그리고 그는 군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왔기에 서먹서먹할 줄 알았는데 뜻밖이었다. 사령관 실에서 차를 들면서 내가 온 이유를 설명하며 부탁을 하자, 윤필용 장군은 기꺼이 도와주겠노라고 말했다.
“대신 내가 직접 대통령 각하께 전하는 것보다는 청와대 정보수석비서인 김시진(金始眞) 장군을 통해 전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
그는 아예 그 자리에서 김시진 장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만에 만나 윤필용 장군과 이런저런 얘기를 마치고 난 뒤, 나는 바로 청와대로 가 김시진 장군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편지를 봉하지는 않았다.
“김 장군께서 내용을 읽어보시고, 혹시 입장이 곤란할 것 같으면 전해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그는 날 믿고 편지를 전해 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힘없는 자나 약한 자를 따뜻하게 대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윤필용 장군은 중학교 때 서로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날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 주었던 것이다. 군인이었지만, 그는 그만큼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