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이후 그는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박 대통령에 의해 완전히 거세되었다. ‘윤필용 사건’이란 1973년 4월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노쇠했으니 물러나게 하고 후계자는 이후락 부장이 해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고 하여, 윤필용과 그를 따르던 하나회 후배들이 쿠데타를 모의한 죄로 대거 구속된 군의 큰 사건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사건은 쿠데타 모의는 아니었다. 사건이 크게 비화된 것은 당시 술자리를 함께 했던 신범식(申範植) 《서울신문》사장이 윤필용 장군의 사석 발언을 박종규 경호실장과 의논 끝에 박 대통령에게 왜곡 보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문제의 발언을 한 자리에서 동석하였던 정소영(鄭韶永) 청와대 경제수석(이후 농수산부 장관)은 그 후 나에게 “그때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함께 했으나 윤필용 장군이 그런 말을 한 바가 없으며, 나는 이를 박 대통령에게 해명까지 한 일이 있다”라고 말한 것이 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윤필용 장군이 딱히 “박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기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하는 직설적인 그의 성격의 그가 박 대통령에 대한 불평을 털어놓은 것을 신범식 사장이 당시 윤필용 장군에 대해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던 박종규 경호 실장에게 알렸고 이를 다시 박 대통령에게 과장·왜곡 보고한 것이 사건이 확대된 원인이 아닌가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 사건 이후로 이후락 씨는 박 대통령의 눈에 벗어나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만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울산에서 당선되어 다시 공화당에 입당하기는 했으나 10·26 이후 그는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완전히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회 대부였던 윤필용 장군은 세상이 바뀐 5공화국에서도 도로공사 사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윤필용 장군은 하나회를 주도해서 만든 육사 8기였고 전두환(全斗煥), 노태우(노泰愚) 등 5공 실세들은 그를 따르던 육사 11기 하나회를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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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른바 윤필용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은 윤필용 전 수도경비사령관 (1973년 4월 28일 자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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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내가 윤필용 장군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전달한 편지에 대한 반응은 며칠 뒤 바로 나타났다. 9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난 뒤, 박 대통령은 이효상 전 국회의장을 불러 당의장직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박 대통령이 날 찾았다는 것이다.
“이만섭 의원은 지금 서울에 있습니까, 대구에 있습니까?”
내 이름이 나오자 이효상 의장은 잘 됐다 싶어 말을 꺼냈다.
“각하! 이왕 말이 나왔으니 말씀입니다만, 제가 당의장을 맡게 된다면 당과 정부의 원활한 협조를 위해서라도 이 의원을 무임소장관에 임명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무임소장관은 국회의원이 해야 하기 때문에 이미 이병희 의원으로 내정이 되었습니다. 어쨌든 외국에 나가려는 것 같은데, 나가지 않도록 당에 붙들어 놓아 일을 하도록 해주십시오.”
결국 박 대통령은 지시를 받은 이효상 당의장은 바로 나에게 연락했고, 그래서 나는 그 내용을 알게 됐다.
“각하의 생각이 그러하니 외국 유학은 없었던 걸로 하고, 다소 고생스럽더라도 당 정책위 부의장 자리를 맡아 날 도와주시지.”
나는 은사이신 이효상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받고 결국 외국에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당시 공화당의 정책위의장은 박준규 의원이었는데, 부의장은 원내에서는 김주인(金周仁), 장승태(張承台), 김유탁(金裕琸) 의원이었고 원외는 나였다. 당의 공식 발표로는 내가 상근 부의장이었지만, 상근으로서 특별한 대우는 없었다. 다만 햇빛이 들지 않는 골방에서 당을 위해 봉사해야 했다.
원외의 고달픔은 상상 외였다. 당시 공화당의 재정 상태는 별로 좋지 않았다. 공식적인 당의 재정위원회도 없어졌고, 모든 정치 자금은 청와대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 운영은 길전식(吉典植) 사무총장이 매달 한 번 청와대에 가서 관공서에서 월급 타오듯 꼬박꼬박 타와 운영해야 했다. 그것도 처음에는 박 대통령에게 직접 받아 왔지만, 나중에는 점차 비서실장으로 격하되었다가 그 후에는 비서실장 보좌관으로 창구가 또 낮아졌다. 이렇듯 당의 위상은 갈수록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당시는 모든 것이 청와대 비서실과 행정부 우선이었고, 당은 뒷전이었다. 그러다 보니 정책 결정도 절차에서부터 왜곡돼 갔다. 국회까지 뒷전으로 밀릴 정도였다. 나중에는 행정부도 정책 결정에 있어서 당과 사전 협의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에게 미리 결재를 받은 뒤 나중에 통고만 할 정도였다.
이토록 어려운 실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내가 할 일은 해야겠다고 결심했기에 종종 행정부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특히 예산 심의와 정책 입안 과정을 통해 대기업에 편중된 정책의 지양과 격심한 빈부 격차의 해소를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중소기업의 육성 발전과 섬유 공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잇는 힘을 다했다. 중소기업을 위해 신용 대출의 폭을 넓혔고, 주요 섬유 도시에는 섬유기술진흥원을 설립하는 한편 직물류세를 폐지하는데도 앞장섰다.
그러나 앞서 밝혔듯이 나는 원외에서 행정부와 맞서기에는 한계를 느꼈고, 그럴 때마다 원내에 다시 진출 해야겠다며 이를 악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