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기어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생각했다. 바른말을 했다고 쫓아내려 한다니,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제야 공화당을 떠날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박 의장, 하나도 걱정할 게 없습니다. 징계위원회를 열어 나를 제명시키면 될 게 아닙니까? 나는 의리상 내가 먼저 공화당을 떠날 수 는 없지만, 당에서 제명해 준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죠. 나도 당을 떠나기를 바라고 있으니 어서 제명시켜 주시오.”
그러나 박준규 당의장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건 안 될 말이요. 공화당이 이만섭 의원을 제명한다면 이 의원은 영웅이 되고, 공화당은 큰 대미지를 입을 텐데 그렇게 할 수는 없지요.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이 의원과 당이 모두 상처를 입지 않는 방안을 강구해 제대로 수습하도록 합시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박준규 당의장이 입을 열었다.
“이 의원이 대통령께 사과드리는 편지를 쓰는 게 어떻겠소?”
솔직히 나는 편지를 쓰는 게 내키질 않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쓴단 말인가.
“그게 이 의원에게도, 당에도 모두 도움 되는 일이니…….”
다시 한 번 박준규 당의장이 간곡히 부탁해 왔다. 사실 나도 당을 떠나도 좋다고 생각하던 터에 마지막 편지쯤이야 쓸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고개를 끄떡이며 입을 열었다.
“좋소. 편지를 쓰지요. 그러나 내게 잘못이 없으니 사과 편지를 쓸 수는 없고, 내 입장을 떳떳하게 밝히는 편지를 쓰겠소.”
‘공화당 1.1% 패배’ 발언으로 결국 박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게 됐다. 사과 편지는 아니지만 솔직한 내 심정을 적었다.
“……제가 발언한 것은 하나도 거짓이 없는 진실된 내용입니다. 또한 저는 전부터 여당 국회의원일수록 국민의 편에 서서 바른 소리를 해야만 여당이 국민의 신임을 얻게 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국회에서는 여당이 야당보다 앞서 바른말을 함으로써 야당의 대정부 공세를 오히려 둔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같은 소신에 의해 발언을 했으나 대통령 각하께서 못마땅하시다면 저는 제명을 포함한 어떤 징계도 달게 받겠습니다.”
이 편지는 그 후 박준규 당의장에 의해 바로 박정희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그 편지를 읽은 뒤 박 대통령이 화를 풀었다는 얘기를 나중에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들었다. 박 대통령은 김재규 부장,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내 편지를 언급했다고 한다.
“오늘 내가 이만섭 의원의 편지를 받았지. 그 친구 고집이 워낙 세서…….”
내 말이 나오자, 김재규 부장이 날 두둔해 주었다는 것이다.
“이만섭 의원은 옛날부터 정의감이 강하고 올바른 소리를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시 김계원 실장도 날 좋게 보았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렇습니다. 각하! 이 의원은 본래 정의감이 강합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의아한 표정으로 김 실장에게 물었다.
“아니, 김 실장은 이 의원을 어떻게 아시오?”
“예, 이만섭 의원은 저하고는 연세대 동문입니다.”
그제서야 박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제를 돌렸다고 한다. 김계원 실장은 연희전문을 졸업한 직후 일찍 육사에 들어간 이력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날 만찬 자리에 함께 있었던 차지철 실장은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밟혔듯이, 차지철 실장은 내 발언을 악의적으로 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장본인이었다.
그 일과 관련해서는 내 발언 직후 김재규 중정부장이 김계원 비서실장, 유혁인 정무수석비서관에게 “이 의원의 발언을 검토한바 문제될 것이 없으니 공연히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문제를 일으키지 맙시다”라고 제의해 두 사람도 이에 동의함으로써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차지철 경호실장이 박 대통령에게 과장되게 보고하는 바람에 다시 문제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차지철 경호 실장은 대통령이 자신을 신임한다는 사실만 믿고 모든 일에 독선적으로 날뛰어 당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바로 내 국회 발언에 대한 태도 역시 그의 안하무인격인 행동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차지철 경호 실장은 마치 부통령과 같은 행세를 하고 있었다. 청와대 경호실 국기 하강식 때도 경호실 직원과 경호원뿐만 아니라 심지어 누구라고 하면 알 만한 대학교수들까지도 동석시킨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
